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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르빈 슈뢰딩거와 파동 역학
    THE SCIENTISTS 2024. 4. 2. 17:56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는 20세기 물리학과 생물학에서 주목할만한 중요성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1920년대에 원자핵 둘레의 전자의 움직임을 기술하는 방정식을 만들었는데, 그 방정식은 서로 별개이면서도 동일한 두방정식 가운데 하나이다. 처음 것은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역학이요, 두 번째가 막스 보른이 물리학을 통틀어 '지극히 경탄할 만한 것으로 평가한 슈뢰딩거의 파동 방정식이다. 게다가 슈뢰딩거는 닐스 보어나 다른 위대한 과학자들처럼 이론 물리학의 새로운 진보가 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깊이통찰했다. 그리하여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짧지만 20세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책을 썼다. 그 책은 수많은 물리학자들에게 생물학의 기본 메커니즘을 연구하도록 격려했다. 그래서 호레이스 프리랜드 저드슨(Horace Freeland Judson)은 "누구나 슈뢰딩거를 읽는다"고 했다. "그 책의 매력은 슈뢰딩거가 유전자를 대수학의 단위가 아니라 거의 완벽하게 안정되어 있으면서 엄청나게 다양하게 표현되는 물질적 본질로서 접근한 그 명쾌함에 있다."

     

     에르빈 슈뢰딩거는 1887년 8월 12일 빈에서 루돌프 슈뢰딩거와 그의 아내게오르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를 무척 사랑했고 숙모는 지나치 게 응석을 받아 주었다. 에르빈은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사실 슈뢰딩거는 이상적인 중상 계층으로 소년 시절을 보냈다. 리놀륨 회사를 소유한 루돌프 슈뢰딩거는 식물 유전에 관한 글을 발표한 아마추어 식물학자이며 이탈리아 회화에 탐닉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아들에게는 "친구이자 교사요. 지칠 줄 모르는 말상대"였다. 열한 살까지 가정교사한테서 배운 뒤 1898년 초 인문학을 중시하는 유명한 아카데미 김나지움에 들어간다. 여기서 고전 문학과 보통 교육을 받고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이모인 미니가 영국 출신이어서 프랑스어, 스페인어,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에다가 유창한 영어까지 배웠다. 어머니는 그가 영어를 익히도록 인스브루크까지 조용히 걷는 동안 "이제부터 끝까지 서로 영어로 말하기다. 독일어는 한 마디도 쓰지 말고"라고 말했다. 마지못해 한 일이었지만 슈뢰딩거는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이제껏 그 일로 얼마나 덕을 많이 보았는지 모른다."

     

     그가 대학에 들어간 1906년은 아인슈타인이 유명한 일련의 논문을 발표한 이듬해였다. 슈뢰딩거는 곧 열심히 물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1910년 빈대 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교편을 잡았다. 1차 대전 때에는 포병 장교로 복무했으며 용감히 싸워 표창도 받았다. 그 세대의 사람들이 그렇듯 슈뢰딩거도 전쟁으로 충격을 받아 인도 철학을 비롯해 철학 연구에 관심을 가졌다. 1925년에는 '나의 세계관 이란 제목으로 개인적 신념을 쓰기도 했다. 인습에 얽매이지 않았고, 19세기 독일의 비관론자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영향을 받아 한때 반종교적으로 기운 것이 사실이다. 필경 위대한 과학자 중 누구보다도 열심히 지크문트 프로이트와 앨프레드 킨제이를 옹호했고, 그 역시 성적 경험을 초월을 얻는 수단으로 여겨 무척 관심을 가졌다.

     

     슈뢰딩거는 1921년 취리히 대학에 자리를 잡고 기체의 통계 역학, 색채 이론, 원자론 등 초기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그는 또한 양자 이론의 진보를 추적했다. 닐스 보어가 1913년에 전자의 움직임에 양자론을 적용한 뒤부터 양자 이론은 중대한 문제와 모순을 낳고 있었다. 밝혀진 바와 같이 한 가지 주된 진보는 1924년에 빅토르 루이 드 브로이가 아인슈타인이 광파가 입자처럼 움직임을 입증한 것과 마찬가지로 특정 조건에서 원자 구성 입자가 파도처럼 운동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이것이 슈뢰딩거에게 중요한 자극이 되었다. 슈뢰딩거는 한 세미나에서 드 브로이의 주장에 대해 듣고 영감을 얻었고 1920 년대 중반 양자론에서 큰 업적을 세웠다.

     

     슈뢰딩거가 파동 방정식을 생각해 낸 것은 1925년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이었다. 그즈음 그의 감정 상태가 어땠는지를 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의 아내에 게는 애인이 있었고, 슈뢰딩거도 위안 삼아 오랜 친구(그녀가 누군지는 아직도 수수께끼이다)와 스위스 알프스의 스키 휴양지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그때 그는 예전에 푼 적이 있는 한 공식의 원리가 '참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연구에 들어가 몇 년간 계속한 끝에 수리 물리학 역사상 매우 중요한 미분 방정식을 만든다. "

     

     실제로 슈뢰딩거는 드 브로이의 가설을 수학 공식으로 만듦으로써, 전자가 원자의 핵 둘레에 산재하는 점이 아니라 제한된 에너지 수준에서 전자 둘레에 밀려오는 정상파(定常波)임을 보여 주었다. 파동 역학의 개념을 해설한 여섯 편 의 논문이 1926년에 출간되었는데 그 중요성은 즉시 인정을 받았다. 과학사가 인 데이비드 캐시디는 이렇게 썼다.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의 위력은 경이롭 다. 파동 역학의 강점은 명백하고 그 심오한 의의는 낭랑히 울려 퍼졌다."

     

     슈뢰딩거가 파동 방정식을 개발한 때와 거의 동시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행렬 역학을 개발하여 원자 구성 입자의 운동을 기술했다. 이 공식은 '양자 도약과 관련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전자를 늘어선 숫자들, 또는 행렬처럼 묘사한다. 슈뢰딩거의 방정식에 비해서는 활용 폭이 그리 넓지 못하다. 그러나 행렬 역학과 슈뢰딩거의 물질파 이론은 그 직후 폴 디랙이 입증했 듯이 수학적으로 등가이다. 막스 보른은 전자의 명백히 파도 같은 운동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확률을 제시했다.

     

     이미 원자 구성 입자가 완전히 기술될 수 없다고 생각한 닐스 보어와는 달리, 슈뢰딩거는 처음에는 자신의 이론이 원자에 대한 완벽한 설명으로 인도해 주길 바랐다. 아인슈타인처럼 그도 보통의 인과 개념을 포기하지 않는 통합 이론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파동 역학 이론이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슈뢰딩거는 코펜하겐의 닐스 보어를 찾아간다. 두 사람은 양자 이론의 철학적 함축에 관해 오래도록 토론했다. 슈뢰딩거는 이렇게 말했다. 양자 도약 개념이 꼭 필요하다면 "내가 양자 이론에 관여한 적이 있다는 것이 유감스럽군요."

     

     보어는 이렇게 답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당신이 양자 이론을 연구한 것이 너무도 고마운 일입니다. 당신의 파동 역학은 수학적으로 참으로 명쾌하고 단 순하여, 양자 역학의 이전 형태 모두를 능가하는 거대한 진보를 보여 줍니다."

     

     1927년 슈뢰딩거는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막스 플랑크가 물러난 뒤 공 석이던 이론 물리학 교수 자리를 이었다. 1933년에는 나치의 부상과 함께 독일을 떠난 첫 번째 과학자 대열에 끼었다. 그는 소극적인 파시즘 반대파였으므로 그가 망명한 원인이 히틀러의 총통 취임에 반대하는 어떤 활동에서 비롯된 것 은 아니었다. 그 해 후반에 영국 물리학자 폴 디랙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 았다. 옥스퍼드의 마그달레나 칼리지에 3년간 있은 뒤 1936년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그라츠 대학에서 강의했다. 곧 1938년의 독일 침공으로 슈뢰딩거는 나 치의 감시를 받는 불운을 맞게 된다. 결국 그는 '총통의 의지'를 지지한다는 '고백문'을 썼다. 그 때문에 호되게 비난을 받고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 그러나 나치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슈뢰딩거는 일자리마저 잃었다. 그제야 뒤늦게 오스트리아에 남는 게 불가능함을 확신하게 된 슈뢰딩거는 아내와 함께 수중에 단돈 10마르크 만을 지닌 채 조국을 떠난다. 이탈리아와 미국에 잠깐 씩 머무르고 나서, 얼마 전 아일랜드의 정치 지도자 에이먼 데 벌레라가 설립 한 더블린 이론 물리학 연구소에 초빙되었다. 그곳에서 1956년까지 있었다.

     

     슈뢰딩거는 천문학자인 아서 에딩턴의 후기 철학 저술에서 얼마간 영감 을 얻어 1935년 무렵부터 킬름스터(C. W. Kilmster)가 '재능의 두 번째 개화'라 부른 일을 해냈다. 더블린에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써서 열역학 법칙에 따라 세포 기능을 설명했다. 슈뢰딩거는 유전자가 엔트로피 혹은 어떤 계(界)에서도 점증하는 무질서를 통제한다고 보았다. 그는 생명의 기초는 생명체의 화학적이고 물리적 성질을 통해서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 로저 펜로 즈(Roger Penrose)가 쓴 바에 따르면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생명의 진정한 신비를 얼마간 이해해 보려는 유력한 시도"였으며, "이 세기의 과학 저술 가운데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책에 속한다."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잘못이 있지만, 그 책은 프랜시스 크릭과 제임스 왓슨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리하 여 DNA 분자의 기능 발견에 지적인 요소로 포함된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슈뢰딩거는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고 싶어 했는데 결국 1956년 본국으로 송환당한다. 그는 빈 대학의 교수직을 맡았다. 하지만 곧 병이 나서 거의 일하지 못했다. 그는 눈에 띄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매우 교양 있고 명쾌하며 관례를 무시하고 조금은 방탕했다. 슈뢰딩거는 1920년에 안네마리 베르텔과 결혼했다. 그녀는 이해심 많은 여성이었는데 전기 작가인 월터 무어(Walter Moore)에 의하면 슈뢰딩거가 그녀를 하녀 부리듯 했다고 한다. 성적으로는 서로 전혀 통하는 바가 없었지만 헤어지지 않고, 두 번의 세계대전 사이에 취리히의 개명된 분위기 속에서 각자 제 일을 보며 생활했다. 에르빈 슈뢰딩거는 1961년 1월 4일에 세상을 떠나서 알파흐 마을에 묻혔다.

     

     슈뢰딩거의 연구는 곧 영향력이란 관점에서 그 자신이 정확히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탐구한 매혹적인 사색이기도 하다. 슈뢰딩거의 파동 이론이 (불가피 한) '양자 도약을 피한다는 명확한 의도와 함께 발달했고, 또 그가 철학적으로는 궁극적인 실재라는 오랜 개념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도 좋다. 그리고 「생명이란 무엇인가?』의 핵심 사상 (즉 생명체는 '부(負)의 엔트로 피'를 특징으로 한다)은 오늘날 오류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실수들 때문에 그의 영향이 줄어드는가?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어찌 되었건 그렇지는 않다. 슈뢰딩거는 과학자들이 잘못된 추론으로도 어떻게 생각을 풍부하게 전개할 수 있는지를 명백히 보여 주는 보기일 따름이다. 여전히 그의 파동 방정식이 양자 역학의 결정적 단계이며 비교적 사용하기 쉽고 광범위한 실제적인 이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생명이란 무엇인가?』가 모든 분자 생물학자에게 영향을 주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슈뢰딩거의 영향이 계속되는 것은 과학적 진보를 닮은 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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