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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폴 디랙과 양자 전기 역학
    THE SCIENTISTS 2024. 4. 5. 10:59

     

     “먼저 디랙을 보라.” 에이브러햄 페이스가 폴 디랙(Paul Dirac)이 양자 역학의 발전에서 핵심 인물이 된 1920년대 물리학의 역사적 고비에 관해 한 말이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에르빈 슈뢰딩거가 원자 구성 입자의 운동을 설명하는 방정식을 만든 것처럼 디랙도 1927년 '장(場) 이론'을 제안하여 물질과 상호 작용하는 빛의 특성을 기술했다. 실로 과학의 역사상 엄청난 업적이었다. 1928년에는 상대성 원리를 이용하여 전자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방정식을 발견했다. 이는 현대의 양자 전기 역학(QED) 발전에서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나아가 디랙은 음전하를 띤 전자와 쌍을 이루는 양전하를 띤 양전자의 존재를 예측했다. 사실상 양전자가 추적된 것은 1932년이다. 양자 이론은 본질상 질량이 없는 많은 '반(反) 입자'를 점쳤는데 양전자가 바로 첫 번째 반입자였다. 디랙이 물리학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지만 모두 추상적인 방정식으로 표현되었다. 그는 닐스 보어,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가 열정적으로 탐구한 새로운 물리학의 철학적 함축에는 관심이 없었다.

     

     폴 에이드리언 모리스 디랙은 영국 브리스틀에서 1902년 8월 8일 찰스 에이드리언 래디슬라브 디랙과 플로렌스 한나 홀튼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위스인으로 프랑스어를 가르친 아버지는 엄한 교육자여서 그와는 무척이나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집안 분위기는 순전히 심리적인 고통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몹시 조용한 성격이었던 디랙은 나중에 이렇게 설명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회적 접촉을 쓸모없다고 생각했고, 게다가 자기에게 말할 때에는 디랙이 거의 알지도 못하는 프랑스어만 쓰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가 말을 걸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지독히 내성적이어서 자연의 문제들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1935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디랙은 아내 마지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이제 훨씬 자유로워진 것 같아."

     

     아버지가 교사로 있는 중등학교 머천트 벤처러스 칼리지를 다녔는데 수학에서 특출했다. 지방의 브리스틀 칼리지에서 전기 공학을 공부했는데 별 흥미를 못 느꼈지만 1921년 최고 성적으로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하고 나서도 일을 구하지 못해 (영국의 높은 실업난 때문이었다) 브리스틀에서 계속 수학을 독해하며 돈을 벌었다. 그의 뛰어난 능력이 알려지면서 1923년 케임브리지의 세인트존스 칼리지의 연구생으로 장학금을 받는데, 그곳에 있으면서 원자론을 공부하고 닐스 보어와도 만난다.

     

     디랙이 양자 역학에서 중요한 업적을 내게 된 것은 역사적인 환경 때문이었다. 그가 케임브리지에 도착했을 때는 양자 이론이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보어-러더퍼드의 원자 모형이 양자 역학의 도움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이 새로운 이론은 수소같이 가장 단순한 원자를 도는 전자의 운동조차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름이 25억분의 1cm도 안 되는 작은 입자를 조사해야 했기에 물리학자들은 인간 지각의 한계를 넘어섰다. 행렬 역학과 파동 역학, 이 두 양자 역학의 해법은 수학적이었고 고전 역학보다 훨씬 더 반(反) 직관적이었다. 행렬 역학과 파동 역학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에르빈 슈뢰딩거에 의해 각 각 1925년과 1926년에 따로따로 발전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디랙이 무대에 등장한다.

     

     1925년 디랙은 양자 이론에 최초의 기여를 한다. 행렬 역학을 처음 다룬 하이젠베르크의 논문 초안을 본 때였다. 디랙은 19세기부터 내려온 고전 역학의 모호한 정식화와 비슷한 면이 행렬 역학에도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그에 상당 하는 공식을 도출하여 하이젠베르크에게 써 보냈다. 그것이 괴팅겐을 적잖이 흥분시켰다. 몇 달 뒤 슈뢰딩거의 방정식이 전자도 원자핵 둘레를 도는 파동의 묶음으로 볼 수 있음을 입증했을 때, 디랙은 이것 역시 오래된 고전적 정식화와 연결할 수 있었다. 사실상 디랙은 고전 역학을 양자 역학의 특수 사례로 볼 수 있음을 입증했다.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역학을 연구한 것이 디랙의 논문 주제가 되었고, 1926년 케임브리지 대학 세인트존스 칼리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해 봄 그는 독일의 하이젠베르크, 코펜하겐의 닐스 보어를 만나서 그들과 같이 일 하기 위해 영국을 떠났다. 가을까지 그는 '변환 이론'을 만들어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역학과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을 하나의 추상적 방정식 안에 통합한다. 1927년 그 이론을 브뤼셀에서 열린 제5차 솔베이 회의에서 발표하여 많은 논의를 일으켰다. 대체로 물리학자들은 디랙을 존경하지 않을 수도 없지만 따르기도 어렵다고 느꼈다. 에르빈 슈뢰딩거 같은 이는 보어에게 디랙은 "자신의 논문이 보통 사람에게 얼마나 어려운지 전혀 모른다"고 불평했다.

     

     이 새로운 양자 이론에도 한계는 있었다. 전자가 천천히 움직인다면 제대로 기술할 수 있겠지만, 전자는 빛의 속도나 그에 가까운 속도로 빠르게 운동한다. 파동 역학과 행렬 역학이 단순한 상태에서는 원자에 대해 정확한 해답을 줄 수 있지만, 빛이 벽에 부딪쳐 튀어 나가는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이러한 일들을 기술하려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채택해야 했다. 1926년 말부터 디랙은 이런 상황을 기술할 수 있는 방정식에 관해 연구한다. 그 결과가 '장 이론'과 유명한 논문 「복사의 방출과 흡수에 관한 양자 이론」이다.

     

     이제 상대성 원리를 따르는 양자 역학이 얼마나 중요한지가 충분히 드러났으므로 디랙은 전자의 운동을 완전히 설명하는 수단에 관해 연구를 계속했다. 몇 년 앞서 전자가 운동할 때 '스핀'을 갖는다는 의견이 나왔는데, 전자 스핀 개념은 여러 원소들의 X선 스펙트럼을 조사함으로써 몇몇 문제를 해결했다. 디랙은 이제 이 개념을 전자의 운동을 기술하는 단일한 방정식에 결합했다. 그 방정식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전자의 운동을 전보다 훨씬 더 정밀하게 해결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디랙 방정식은 전자를 공간상의 한 지점에 배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양자 이론과 합치되는 방식으로 확률로 표현되는 가능한 장소의 범위를 제공한다. 그 이론은 전자를 둘러싸는 자기장을 예측하고, 4차원의 시공간을 반영하는 전자의 운동을 계산하는 데 필요한 4개의 '양자수'를 제시한다. 디랙 방정식은 뒷날 디랙이 얘기한 대로 "이미 알려진 실험적 사실에 부합하는 논리 정 연한 이론"이다.

     

     하지만 그 방정식의 가장 뛰어난 면은 원자가 '가상의' 질량 없는 입자들의 바다에 덮여 있다는 미심쩍은 의견을 구체화한 데 있다. 로버트 크리스(Robert P. Crease)와 찰스 만(Charles C. Mann)은 이렇게 썼다. "디랙은 현대 전자기 이론의 기초(최초의 실속 있는 표준 모델)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부지 불식 간에 개념이라는 악마의 맹공을 풀어 줌으로써 공간과 물질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바꾸어 놓았다." 계속해서 디랙의 이론은 "물질 가장 밑바닥에 있는 질서의 놀라운 혼돈을 폭로했다. 원자를 둘러싸고 있는, 그리고 원자 내부의 공간들이 전에는 비어 있다고 여겨졌으나 이제 유령 같은 입자들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수프로 가득 차 있다고 가정하게 되었다."

     

     정말로 디랙은 1930년에 실제로 전자와 쌍을 이루면서 양전하를 띠는 소립자의 존재를 예견했다. 당시에는 좀 기이하게 생각되었지만, 최근 실험 물리학 자들이 대기권 밖의 우주로부터 지구의 대기에 충격을 가하는 '우주선(線)'을 발견한 바 있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우주 복사를 연구하기 위해 만든 강력한 안개 상자가 정말로 전자와 '같은 질량에 '양의 전하를 띤 소립자들의 자취를 드러냈다. 이것이 양전자로 1932년 처음 발견되었고 '반물질'의 첫 번째 형태이다. 1933년 폴 디랙은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927년 세인트존스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으로 선출되어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32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루카스좌 물리학 교수가 된다. 1969년까지 그 자리에 있었지만 자주 해외에 나가 가르치고 강의했다. 1960년대 말 플로리다로 옮겨 1972년부터 1984년까지 플로리다 주립대학의 물리학 교수로 재직했다. 디랙의 아내 마지 위그너는 헝가리 태생의 뛰어난 물리학자 유진 위그너의 누이로, 디랙 부부는 슬하에 딸 둘을 두었다.

     

     디랙은 기인이었지만 물리학계의 명사로서 많은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한 신문은 그를 가리켜 "가젤(북아프리카, 아시아산 영양의 일종)처럼 수줍 어하고 빅토리아 시대의 아가씨처럼 온순하다"고 묘사했다. 그는 종종 심리학자들이 구체적인 생각이라고 했을 것에 의지하기도 했는데, 그것으로 동료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언젠가 한 사람이 "오늘은 바람이 몹시 부는군" 하고 이 야기를 꺼내자, 디랙이 저녁을 먹다 말고 일어나 문을 열어 보곤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정말이야." 볼프강 파울리가 살을 빼야겠다며 디랙에게 커피에 각설탕을 얼마나 넣어 먹어야 하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한테는 하나면 충분하겠어." 잠시 후에 디랙은 "각설탕은 원래 누구에게나 하나면 되도록 만 들어진 것 같아"라며 일반화했다.

     

     정치적으로 얼마간 좌파쪽이었던 디랙이 소련 과학과 접촉하자 미국은 냉전 기간에 그에게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그는 미술이나 문학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그가 자라난 배경을 생각한다면, 뒤에 양자 전기 역학을 발전시킨 리처드 파인먼을 연상하게 된다. 만년에 디랙은 '수학적 아름다움'이라는 그만의 개념을 강조했다. 그의 전기를 쓴 헬게 크라흐(Helge S. Kragh)는 "1930년대 중반이 주요한 경계선으로 나타난다. 디랙의 뛰어난 발견들은 모두 그 시기 이전에 이루어졌고, 1935년 이후에는 지속적인 가치를 지닌 물리학을 만드는 데 대부분 실패했다"는 것을 그 이유 중 하나로 들었다. 그러나 존 테일러(John C. Taylor)가 쓴 바 있듯이 양자 이론에 '확실한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뉴턴 역학이 한 것처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이론을 탄생시킨 것이 디랙이었다는 사실은 그 무엇으로도 퇴색하지 않는다. 폴 디랙은 1984년 10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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