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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와 새로운 해부학THE SCIENTISTS 2024. 4. 8. 10:50
중세 말 의학 분야에서 대단한 권위를 누린 인물은 2세기에 활동한 그리스 의사 갈레노스(Galenos)였다. 스콜라 철학자들이 물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꼽듯이, 당시 교회는 뛰어난 의사이자 작품을 많이 남긴 저술가인 갈레노스를 의학, 특히 해부학의 주된 판관으로 여겼다. 오랫동안 그렇게 하는 데 별문제는 없었다. 특히 중세에는 인간의 신체를 정신적 개념으로 파악했으므로 신체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의 전망은 어두웠다. 그러나 새로 비종교적인 견해가 대두하여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유화와 드로잉 등에서 생생 하게 표현되자, 중세식 사고는 뒷걸음질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근대 해부학의 초석을 마련한 이가 바로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이다. 그는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인간의 신체를 새롭게 기술하는 것 이상 값어치 있는 일은 없다. 누구도 인체의 해부학이 무엇인 지 이해하지 못한다."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는 1514년 12월 31일 합스부르크 제국 영토인 브뤼셀의 이름난 의사 집안에서 났다. 아버지 안드레아스는 황제 카를 5세의 약제사였고, 어머니는 이자벨 크라베였다. 교수형 집행 광경이 보이는 곳에 집안 영지가 있었는데, 이는 훗날 그의 관심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곳에서 도시의 죄수들이 처형되고 시체가 버려졌으며, 그 시체는 며칠 동안 새들의 먹이가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베살리우스는 작은 동물들을 해부했는데, 운 나쁘게 길을 잃은 고양이나 개도 제외되지는 않았다.
루뱅 대학에 다닌 다음, 1533년에서 1536년까지 당시 보수주의 사상의 보루인 파리 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했다. 그가 나중에 말했듯이 그곳에서는 쓸 만한 것을 전혀 배우지 못했다. 스승인 안데르나흐의 귄터가 해부학 서적을 내는 것을 돕고 나서는, 스승이 인체의 구조에 관한 한 배운 적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파리에 있으면서 이노상 묘지를 돌아다니며 뼈를 구하고 몽포콩에서 처형된 죄수들의 시체를 조사했다. 그곳에서 "들개들 때문에 위험에 빠진" 적도 있다고 나중에 썼다.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의 전쟁으로 1536년 하는 수 없이 파리를 떠나 루뱅 대학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의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이탈리아의 파도바 대학으로 가서 1537년 우등으로 졸업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공부했고 나중에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학생들을 가르 친 파도바 대학은 베살리우스가 주요한 공을 세운 주무대였다. 박사 학위를 받은 직후인 1537년 파도바 대학의 외과학 및 해부학 교수로 임명된다.
의과대학에서는 시체 해부가 금지되지 않았는데 14세기 이래 어디서나 그랬다. 하지만 해부의 방식은 스콜라풍이었다. 이발사가 인체를 절개하고 교수가 갈레노스의 교과서를 읽는 동안 학생들은 방청석에서 지켜 본다. 훗날 베살리우스가 쓴 것처럼 "모든 게 잘못 가르쳐지고 있다. 어리석은 질문에 시간을 허비하고, 그런 혼란 속에서 구경꾼들이 얻는 것이라곤 도축자가 축사에서 의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만큼도 안 된다."
그리하여 베살리우스는 학생들 앞에서 시체를 직접 해부했고 단시일 내에 상당한 명성을 얻게 된다. 1538년 『개의 해부도』를 출판한다. 갈레노스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베살리우스의 연구 방향이 나타나 있다. 삽화는 티치아노의 제자인 플랑드르 파 화가 얀 스테판 반 칼카르가 훌륭하게 그려 냈다. 2년 뒤 볼로냐의 성 프란체스코 교회에서 강연과 시범을 부탁받았다. 거기서 여러 가지 오류를 지적하여 갈레노스파 교수인 마테오 코르티 (Matteo Corti)의 분노를 샀다.
1543년 처음 선보인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는 유례가 없는 해부학 교과서 로서 의학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베살리우스는 자신이 존경하는 갈레노스를 직접 공격하지 않으면서 수많은 오류를 바로잡았다. 예를 들어 사람의 넓적다리뼈는 개의 것처럼 굽어 있지 않으며, 남자와 여자의 늑골개수는 같다는 등이다. 또한 간에 5개의 엽(葉: 기관의 둥근 돌출부)이 있다거나 자궁이 뿔 모양이라는 등의 주장도 생명을 다했다.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의 취지는 학생들의 연구의 길잡이이자 실용적인 편람으로서 학생들에게 직접 혼자 힘으로도 인체의 내부를 관찰할 수 있다는 의욕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흉부의 남은 기관들을 용기에 담고 나면 시체를 엎드리게 하고 가능한 한 목과 척추, 흉부 전체 등에서 살을 깨끗이 제거한다. 부서지기 쉬운 갈빗대를 하나라도 부러뜨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너무 붙여서 절개하여 돌기 하나라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흉부의 추골에서 갈빗대를 하나하나 신속하게 떼 낼 때 특히나 주의해야 한다." 베살리우스는 개인 편차를 모르지 않았고, 제자들이 인체 구조상의 차이를 찾기 바랐다.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가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동료들과 잘 융화하지 못한 베살리우스는 신랄한 공격을 받는다. 1551년 야코부스 실비우스는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의 저작에 대한 미치광이의 중상을 논박함』을 출간했다. "여러분은 재능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으면서 스승들에게 위선적으로 악담과 독설을 퍼부은 한 우스꽝스런 미치광이에게 전혀 신경 쓰지 말아 달라.” 그러나 곧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의 엄청난 영향은 의문의 여지 없이 확실해졌다. 그 책은 때마침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나온 지 한 주 안에 발표되었다. 실제로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는 코페르니쿠스의 책처럼 즉각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더 짧은 기간에 혁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베살리우스의 전기를 쓴 오말리(C. D. O'Malley)는 "17세기 초 무렵에는 소수 보수주의자의 근거지인 파리와 제국 내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베살리우스의 해부학이 학계와 일반 대중 모두의 지지를 얻었다"고 썼다.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를 낸 직후 무엇 때문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살리우스는 황제 카를 5세의 주치의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수락했다. 당시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장기간 싸웠지만 결국 지고 만다. 오래 전부터 황실에 봉직해 온 가문 출신으로 황제의 주치의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터였다. 베살리우스는 유명했고 크게 존경받는 의사였다. 전처럼 해부가 주된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1555년까지도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를 개정했으며 가끔은 의과대학을 방문했다. 베살리우스는 카를이 1556년 아들인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에도 황제를 위해 일했다. 그의 말년 은 확실하지 않은데, 1564년 성지 순례에서 돌아오는 길에 난파해 펠로폰네소스 해안에서 떨어진 자킨토스 섬에서 죽었다.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는 성격 분석 때문에 명예 훼손을 당한 흥미진진하고 어처구니없는 사례의 주인공이 되었다. 1943년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 출간 500주년을 맞아 <의학사 회보>가 펴낸 베살리우스 특집호에 이런 글들이 실렸다. 루트비히 에델만(Ludwig Edelman)은 베살리우스를 '인문주의자의 옷'을 입은 사람으로 추어올렸고, 정신 의학자 그레고리 질부르크(Gregory Zilboorg)는 유사 정신 분석적 전기문을 썼다. 그는 베살리우스의 의식 구조를 해부하여 그를 정신 분열증 환자이자 병리학적으로 억압된 인격의 소유자여서 살육자가 되었을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질부르크는 베살리우스를 "자기 시대의 문제들에는 거의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싸움을 모르는 사람"이고, "상대방과 결말이 날 때까지 싸우도록 기다리지도 않았다"고 썼다. 이런 견해는 근거가 희박한데, 질부르크가 그 글을 쓰던 때가 미국이, 또 그가 태어난 러시아가 한창 2차 대전을 치르는 중이었던 사실과 필시 관계가 있을 터이다. 미국의 적은 하나는 이탈리아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이었다. 그런데 베살리우스는 독일 땅에서 나서 이탈리아에서 교육받은 인물이다.
오늘날 의사라면 누구나 베살리우스를 알고 있다. 1932년 의사인 루이스 브 래그먼 (Louis Bragman)이 『시로 푼 의학의 역사』에서 거듭 호소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침이 아니다.
해부로 훌륭한 명성을 얻고
고대의 잘못들을 논박했네.
베살리우스, 성상 파괴자여,
권위에 매이지 않고
갈레노스의 교리에 회의(懷疑)를 새겨새로운 해부학을 만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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