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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트 드 뷔퐁과 박물지THE SCIENTISTS 2024. 4. 13. 10:42
1749년 루이 15세의 왕립 식물원 원장인 콩트 드 뷔퐁(Comte de Buffon)이 쓴 『박물지』의 첫 권이 출판되었다. 그때부터 40년에 걸쳐 43권이 더 간행되었는데, 마지막 여덟 권은 뷔퐁이 죽은 뒤에 나왔다. 독창적인 연구는 아니었지만 사색이 곁들여진 『박물지』로 뷔퐁은 생물학 발달에서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는 뉴턴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세계가 기적과 성서의 연대기와는 전혀 무관한 물리적 인과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견해를 키워 갔다. 뷔퐁은 여러 방면의 다양한 문제들에 관한 기존 지식에 의문을 던지면서 우주의 나이에서 동물종의 발달에 이르기까지 자연 과학의 방대한 주제를 과학적으로 면밀하게 조사했다. 생물학, 동물학, 지리학, 인류학, 우주 생성론 등, 이 모두가 뷔퐁의 시야 안에 있었다. 더군다나 뛰어난 문장가이기도 해서 그가 쓴 책은 각별한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가 한 말 중에 자주 인용되는 경구 "재능이란 남달 리 잘 참는 소질이다"는 아이작 뉴턴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콩트 조르주 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은 1707년 9월 7일 부르고뉴의 몽바르에서 방자맹 프랑수아 르클레르와 안 크리스틴 마를랭의 아들로 태어났다. 뷔퐁가는 부상하는 부르주아 집안이었다. 방자맹 프랑수아는 아내의 유산 덕분에 몽바르의 영주 뷔퐁 경이 되어 부르고뉴 의회의 고문으로 일했다. 조르주 루이는 디종의 예수회 학교에 보내졌는데 특별히 눈에 띄지는 않았고 수학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법률을 공부하기를 바랐지만, 10대 말이 되었을 무렵 뷔퐁의 관심은 과학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1728년 그는 앙제의 대학에서 의학, 수학, 천문학과 식물학을 공부했다.
결투에 말려든 직후 1730년 뷔퐁은 공부를 중단하고 한동안 프랑스를 떠나 있어야 했다. 그는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한 뒤 영국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영국 과학에 감명을 받고 영향을 받게 된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프랑스로 돌아온 뷔퐁은 아버지가 자기가 물려받기로 되어 있는 몽바르의 재산을 요구한 데 깜짝 놀랐다. 법적 분쟁에서 뷔퐁이 이기기는 했지만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장나 버렸고, 두 사람은 다시는 서로 말하지 않았다. 뷔퐁의 운명이 그 재판의 결과에 달려 있었다. 왜냐하면 독립할 재산이 없다면 과학 연구에 착수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1730년대 초에 뷔퐁은 군함 건조에 쓰는 목재의 장력(張力) 강도를 연구하여 책으로 냈다. 뉴턴의 미적분법을 이용한 확률 이론을 응용하여 프랑스의 복권에 관한 에세이도 썼다. 지위가 높아져서 1734년에는 왕립 협회의 준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나중에 정회원이 되었다. 6년 뒤에는 영국 왕립 협회 회원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지위 상승은 1793년에 국왕이 그를 자르댕 뒤 루아를 감독하는 자리에 임명한 것이다. 그 일에는 왕립 박물관과 식물원, 동물원의 관리 책임도 포함되었다. 뷔퐁은 이제 가장 야심 찬 계획에 착수하게 된다.
『박물지』는 당시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디드로의 『백과전서』와 함께 계몽사상의 초석으로 꼽히게 된다. 첫째 권 『자연사를 다루고 기술하는 방법의 발견』에는 자연계의 형성과 발전으로부터 그 안에 사는 모든 종류의 동물에 이르기까지 자연계 전체를 탐사하겠노라는 주장이 피력되어 있다. 중요한 점은 뷔퐁이 자연사를 종교적인 연구와 분리한 것이다. 그는 초자연적이거나 신학적 설명을 요구하는 해답들을 깊이 생각하기는 했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이 점에서 그는 의식적으로 아이작 뉴턴을 닮으려 했다. 자연사에서 신과 목적론 사상을 배제하는 일은 세계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단계였다.
뷔퐁이 다룬 문제들 가운데에는 오늘날에도 타당성을 인정받을 만한 것도 여럿 있다. 그 한 가지는 동물의 종(種)을 자기 종 안에서 번식하는 집단으로 정의한 것이다. 뷔퐁이 실험을 통해 발전시킨 이 기준은 20세기의 진화론적 생물학이 발전시킨 것과 비슷하다. 뷔퐁은 스웨덴 식물학자 카를 린네와는 적수였다. 뷔퐁은 린네의 분류 체계를 인위적인 것으로 여겼다. 뷔퐁의 종 이론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가 점진적으로 자기 이론을 만들어 갔다는 사실이다. 뷔퐁은 나중에 포기하지만 처음에는 유명론(有名論)의 관념을 따라 자연을 사람들이 이름표를 붙임으로써 분류되는 거대한 혼합물로 보았다.
지금까지도 흥미를 11끄는 뷔퐁 사상의 또 다른 요소는 지구의 나이와 우주 생성에 관한 고찰이다. 처음에는 지구의 나이를 성서에서 말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7만 5,000년으로 잡았다가 나중에는 300만 년이 적정 수치라고 생각했음이 수고에 나타나 있다. 뷔퐁은 지구가 가스 상태로부터 형성되었다고 보았는데, 몇 차례의 신기원을 거치는 동안 현재 상태로 되었음을 그 근거로 들었다. 뷔 퐁이 증거로 제시한 화석 유물에 따르면 동물은 대륙들이 형성되기 전에 출현 했다.
뷔퐁을 근대 지리학이나 생물학의 선구자로 보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 그의 작업은 다른 사람의 관찰 결과를 광범위하게 종합한 것이며, 그 자신은 세부사항에 관해서 다윈과 같은 눈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실험들을 해냈다. 최근까지도 반복되는 실험들에서 그의 과학적 취지를 엿볼 수 있다. 그는 대중이 과학의 힘을 이해하도록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재닛 브라운(Janet Browne)이 최근에 평한 바에 따르면, 그의 시대에 "교양 있는 사람치고 그의 연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가 그 세기에 과학적 연구가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고 느끼지 않은 자연 과학자와 철학자는 거의 없었다." 실제로 그의 영향은 윌리엄 허셜에 비유된다. 허셜이 관찰한 내용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짐으로써 대개 낡은 것이 되었지만 그의 영향만큼은 과학의 역사적 궤적에 남아 있다.
뷔퐁은 1752년 아주 늦게 결혼했는데 17년 뒤에 혼자되었다. 아내인 마리 프랑수아즈 드 생벨랭과는 슬하에 남매를 두었는데, 아들은 단두대에서 최후 를 맞았다. 뷔퐁 자신은 1788년 4월 16일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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