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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니스트 러더퍼드와 원자의 구조
    THE SCIENTISTS 2024. 4. 3. 17:45

     

     19세기의 물리학자들처럼 고대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도 원자란 평형과 안정성을 특징으로 하며 견고하고 또 쪼갤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이 견해는 불안정한 방사성 원소가 발견되고 나서 1900년 무렵 무너지게 되는데, 방사성 원소의 발견은 원자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근대적 원자가 창안된 것은 1895년 빌헬름 뢴트겐(Wilhem Röntgen)의 신비로운 X선 발견, 피에르와 마리 퀴리 부부의 방사성 발견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처음으로 원자의 구조를 멋지게 설명한 공은 뉴질랜드 물리학 자인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에게 돌아가야 한다. 러더퍼드가 개발한 원자 모형은 작고 꽉 채워진 핵 둘레를 전자들이 회전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핵물리학을 창시하고 방사성 붕괴를 설명했으며 원소의 주기율표를 바로잡는 데에도 한몫했다. 흔히 마이클 패러데이와 함께 과학 역사상 가장 걸출한 실험가로 꼽히며 죽은 뒤에 '원자 물리학의 뉴턴'으로 칭송받았다.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1871년 8월 30일 뉴질랜드 스프링그로브에서 제임스 러더퍼드와 마사 러더퍼드의 열두 자녀 중 넷째로 났다(형제 중 아홉만이 살아 남아 어른이 되었다). 제임스 러더퍼드는 아마 재배, 차바퀴 제조, 제분소 경영 등 다채로운 이력을 가졌는데 자주 집을 비웠다. 러더퍼드는 학교 선생이었던 어머니와 가깝게 지냈다. 그는 열 살에 물리학 관련 서적을 처음 읽었고 물리학에 재능이 있었다. 1887년 초 장학생으로 넬슨 칼리지에 들어갔고 우수한 학생이었다. 러더퍼드는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뉴질랜드 대학의 캔터베리 칼리지에 들어가 1892년 수학과 물리학에서 모두 '1등'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듬해 석사 학위를 받고 1894년에는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 1895년 영국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하라는 통지가 왔을 때 농장에서 일하고 있던 그는 삽을 내려놓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게 내 인생에서 내 손으로 캐낸 마지막 감자예 요."

     

     러더퍼드가 케임브리지에 도착한 때는 마침 1895년 빌헬름 뢴트겐이 X선 을, 앙리 베크렐(Henri Becquerel)이 신기한 우라늄 방출을 발견하는 뜻밖의 수확이 쏟아진 때이다. X선과 우라늄의 생소한 여러 성질로 과학계는 온통 흥분에 들떠 있었다. 곧 러더퍼드는 캐번디시 연구소 소장인 조지프 J. 톰슨과 그것들을 연구한다. 톰슨은 X선이 기체에 전기가 통하게 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얻어진 전도성은 그 기체를 유리 양모에 통과시키거나 전기가 통하는 판 사이를 지나가게 하면 없어졌다. 이는 X선이 입자로 이루어졌음을 보여 주었다. 러더퍼드는 그 입자들의 물리적 실재를 확신하면서 "유쾌하고 귀여운 이 녀석들은 아주 현실적이다. 꼭 직접 본 것만 같다"고 말했다. 60년 이상 물속에 존재한다고 알려진 것과 비슷한 이온화가 기체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이 이제 입증되었다. 1896년 톰슨과 함께 한 이 발견으로 러더퍼드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말년에 러더퍼드는 1897년에 방사성 현상을 연구하기로 한 것이 일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노라고 회고했다. 1898년 그는 우라늄에서 두 가지 형태의 방사성 기체(에머네이션)를 식별하고 각각 알파선과 베타선이라 불렀다. 알파 복사(나중에 발견된 바로는 헬륨 원자핵으로 이루어졌다)는 전리가 쉽지만 공기를 뚫고 지나가지는 못하며 공기로 막을 수 있다. 베타선(나중에 고에너지 전자 임이 밝혀졌다)은 전리가 잘 일어나지 않지만 훨씬 잘 침투하며 두꺼운 금속판도 통과할 수 있다. 지금까지도 전모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알파선과 베타선은 러더퍼드의 손 안에서 원자의 성질을 발견하는데 매우 중요한 실험적 연구가 되었다.

     

     1898년 몬트리올의 맥길 대학으로 오라는 제의를 받아들였다. 거기서 그는 실험실의 훌륭한 시설과 그곳에 비축되어 있는 희귀하고 값비싼 브롬화라듐을 이용할 수 있었다. 또 화학자 프레더릭 소디 (Frederick Soddy)를 만나 7년 동안 긴밀하게 협력했다. 러더퍼드와 소디는 몇 년 전 이브(A. S. Eve)가 "방사성의 근본 원리를 규정했다"고 쓴 바 있는 기본적인 실험을 했다. 특히 방사성 원소인 토륨이 어떻게 정해진 비율로 붕괴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련의 다른 원소들로 바뀌고 결국 납 형태로 안정화되는지를 보여 주었다. 여기서 '반감기' 개념이 나왔다. 일찍이 1904년 러더퍼드는 방사능을 이용해 지구의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지를 논의했다. 세기 전환기에 원자는 파괴될 수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진 계율이었음을 생각하면, 이 같은 원소의 변환은 많은 과학자들에게 연금술처럼 비쳤다. 러더퍼드와 소디가 1905년 그 이론을 책으로 내자 적잖은 비판이 일었다.

     

     방사성 연구에서 나온 훨씬 더 뛰어난 일반화는 원자 자체의 구조였다. 러더 퍼드는 1907년 영국으로 돌아와 맨체스터 대학의 물리학 교수가 되어, 한스 가이거(Hans Geiger)와 어니스트 마스덴(Ernest Marsden) 등이 포함된 학생팀을 지도했다. 여기서 훨씬 더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러더퍼드와 동료들은 라듐 한 덩어리를 가지고 실험하다가 라돈에서 나온 알파 입자를 황화아연 막을 두른 금박 편에 충돌시켰다. 생각한 대로 알파 입자들은 대부분 금박을 통과했다. 그러나 분명 몇몇 입자가 튀어나왔다. 황화아연을 맞추어 불꽃이 튀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나중에 러더퍼드는 "얇은 종이를 향해 발사한 38 구경 탄 환이 튀어나와 당신을 맞히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러더퍼드는 존 돌턴 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 온대로 원자가 '딱딱한 멋진 놈'이 아님을 알아냈다. 오히려 원자는 한 점에 집중된 전하로, 그 점은 "균일하게 공간에 분포되어 있는 같은 크기의 반대 전기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알파 입자는 질량과 속도를 지니고 금박의 원자를 뚫고 지나는 반면, 가끔 알파 입자가 핵 가까이 지나게 되고 빗나가게 된다. 러더퍼드는 중앙에 있는 입자의 크기를 대략 원자 전체 면적의 1만분의 1 가량 된다고 추산할 수 있었다. 그는 1911년 3월 7일 맨체스터 문학·철학 협회 모임에서 이 발견을 공표했다.

     

     그리하여 러더퍼드는 태양계를 축소한 것 같은 원자 모형을 개발한다. 작지만 질량이 큰 핵이 있고, 훨씬 더 작은 전자들이 그 둘레를 돈다. 1914년에 그는 원자핵 자체는 음전하를 띤 전자들과, 뒤에 양성자라 명명한 '양전하를 띤 전자들'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러더퍼드의 원자(러더퍼드-보어 원자라고 도 한다)는 중요한 결함이 있었고 뒤에 양자 역학의 출현으로 크게 수정되었다. 그렇지만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은 현대 물리학 역사의 핵심이 되었으며 아울러 주기율표의 필수적인 수정을 위한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러더퍼드가 마지막 탁월한 업적을 세운 것은 1차 대전중이었다. 그는 연금 술사가 꿈꾸던 실험 과정에 착수했다. 이미 원자가 어떻게 쪼개질 수 있는지, 또 방사성 원소가 어떻게 다른 원소로 붕괴될 수 있는지를 입증했으므로 그는 이렇게 추론했다. 핵에서 한두 개 이상의 입자를 방출시킬 수만 있다면 한 원자를 다른 원자로 변환시킬 수 있을 것이다. 대기 중의 질소에 알파 입자를 충돌시키자 수소 원자핵이 방출되었다. 1차 대전중에 실험을 하느라 방위 운동에 참석하지 않은데 대해 그는 영국 당국에 용서를 구하며 이렇게 써 보냈다. "제가 믿고 있는 대로 원자의 핵을 붕괴시키는 데 성공하면, 이는 이 전쟁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될 겁니다." 뒤에 알려지듯이 이것이 최초의 원자핵 분열 사례가 된다.

     

     그 뒤로도 17년간 연구를 계속했지만, 이것이 탁월한 중요성을 지닌 러더퍼드의 마지막 작업이 된다. 그는 나중에 맨체스터에서 케임브리지로 옮겨, 사임 한 조지프 J. 톰슨의 뒤를 이어 1919년 캐번디시 연구소 소장 일을 맡았다. 그 는 불행한 사고를 당한 뒤 배꼽헤르니아에 감염되어 1937년 10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살아 생전에 온갖 영예를 누렸다. 1908년 노벨상을 받았다. 그런데 묘하게도 화학상이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순간적으로 변해" 화학자가 된 물리학자라는 농담이 생겨났다. 1914년 기사 작위를 받고, 1925 년부터 1930년까지 왕립 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931년에는 귀족이 되었다.

     

     위대한 과학자의 전형이었던 러더퍼드는 많은 찬사를 받아 왔다. 친절하고 사교성이 풍부했던 그는 총명하고 박식하며 현실적인 메어리 조지나 뉴턴과 결혼했다. 뉴질랜드에 남은 어머니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정이 많았다. 귀족이 되었을 때는 어머니에게 "러더퍼드 경, 나 어니스트보다 더 많은 영예를 당신께"라고 써 보냈다. 그는 1935년 어머니가 죽자 무척 괴로워했다. 정치적 으로는 자유주의자였고 종교는 없었다. 러더퍼드 자신이 과학 관련 주제를 탁월하게 다룬 작가이기도 했지만 그의 전기를 쓴 데이비드 윌슨(David Wilson) 은 "러더퍼드가 자신에 관해 쓰게 된다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지루할 것”임을 알았다. 안드레이드(E. N. da C. Andrade)는 이렇게 썼다. 매우 개성이 강한 인물이었던 "러더퍼드는 저술에 몰두하고 있을 때면 언제나 불 같고 전염되기 쉬운 열정에 사로잡혔으며 다른 사람의 연구를 인정하는 데에는 언제나 관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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