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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돌프 피르호와 세포설
    THE SCIENTISTS 2024. 4. 1. 17:26

     

     19세기 중반까지 세포라 하면 유럽인들은 주로 수도사들의 예비 거주지를 떠올렸다. 로버트 훅이 1665년 복합 현미경으로 코르크 단면에서 '무수한 조 그만 상자들'을 관찰하여 그것들을 벌집에 비유하고 사방이 막히고 속이 빈 공간이란 뜻으로 이름을 달았다. 그러나 그 뒤 200년 동안 세포의 꽉 찬 내부와 살아 있는 유기체에서 세포가 하는 근본 역할은 해명되지 않았다. 1838년과 1839년이 되어서야 광학이 발전하고 식물학자 마티아스 슐라이덴(Matthias Schleiden)과 동물학자 테오도어 슈반(Theodor Schwann)이 이론을 발전시킴에 따라 세포의 폭넓은 의의가 제안된다. 그러나 세포 이론의 천재는 독일의 의사이자 해부학자로 세포 병리학의 아버지인 루돌프 피르호(Rudolf Virchow)이다.

     

     당대에 매우 유명한 의사였던 피르호는 파스퇴르와는 달리 근본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공격하고 실험 자료에서 일반론을 도출해 내며 그 일반론을 인정받기 위해 싸우는 능력으로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정치에 관여한 과학자이자 급진 정치가로 의사란 “모름지기 빈민의 변호인"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숨지자 전기 작가인 에르빈 아커크네히트(Erwin H. Ackerknecht)는이렇게 썼다. "독일은 한꺼번에 네 명의 위인을 잃었음을 통탄할 것이다. 독일의 첫째가는 병리학자와 첫째가는 인류학자, 첫째가는 공중위생학자, 그리고 첫째가는 자유주의자를."

     

     루돌프 루트비히 카를 피르호는 1821년 10월 13일 지금은 폴란드령이지만 그때는 발트 해안의 프로이센 포메른 지방에 있었던 시펠바인에서 났다. 아버지 카를 크리스티안 지크프레트 피르호는 농부이자 실패한 사업가로 도시의 출납 담당자였고, 어머니는 요한나 마리아 헤세였다. 열네 살에 집을 떠나 김나지움에 들어간 루돌프는 뛰어난 학생이었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서 "전지전능한 신에서 하찮은 돌멩이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지식"을 갖고자 했다. 1838년에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연구소에서 장학생으로 의학을 공부하게 된다. 거기서 미시 해부학과 병리 해부학에서 중요한 진보를 보인 생리학을 연구하던 요하네스 페터 뮐러(Johannes Peter Müller)의 지도를 받았다. 1843년 의학사 학위를 받는다.

     

     피르호는 의학의 지적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베를린 샤리테 병원의 인턴이 되었다. 처음에는 병리과 해부 담당으로 해부학 실험에서 직접 해부를 했다. 1847년 객원 강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첫 번째 연구를 시작했다.

     

     초기에는 당시 병의 원인으로 여겨진 정맥의 염증성 질환, 즉 정맥염을 연구 했다. 응고된 혈병(血餅)에서 주요 단백질인 피브린을 분석하여 그것이 혈액 응고에 중요함을 보여 주었고, 색전증(塞栓症)과 혈전증이란 용어를 만들었다. 피르호는 정맥염을 일으키는 혈병은 염증의 국부적 원인이 아니며 다른 쪽에 서 옮아온 변질된 세포임을 입증했다. 마찬가지로 고름은 백혈구로 이루어졌 다. 그는 또한 백혈구의 형성을 관찰하여 백혈병에 대해 기술했다.

     

     피르호는 1840년대 불안정한 사회 현실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프로이센 에서 억압받는 폴란드 소수 민족의 고향인 상(上) 슐레지엔의 유행병을 조사한 뒤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대중 매체가 그 병을 폭로한 다음 정부가 구성한 위원회의 일원으로 슐레지엔을 돌아보고 나서 그 유행병의 근본 원인이 사회에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한다. 피르호의 첫 번째 정치적 공격이었다. 그는 그 유행병에 대해 '민주주의, 교육, 자유와 풍요'라는 처방을 내렸다. 그가 웅변 적으로 던진 질문은 19세기만이 아니라 지금도 분명히 울려 퍼지고 있다. "인 간 재능의 승리가 가져올 결과가 이것뿐이란 말인가? 인류가 이 이상 비참해질 수 있는가?"

     

     1848년 혁명 때에는 베를린에서 행동에 가담했고 (별 도움은 안 되었지만 바리케이드전에도 참가했노라고 털어놓았다) 독일의 의료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활동했다. 그는 급진파 주간지인 <의료 개혁>을 간행하여 의사란 무릇 빈민을 위해 일할 의무가 있다고 선전했다. 프로이센 의회에도 선출되지만 나이가 어려 봉직할 수 없었다. 피르호는 불가지론자인 데다 완고한 반왕당파 이기도 해서 뒤이은 반동기에 고초를 겪었다. 얼마 되지 않던 봉급마저 깎였고 사실상 샤리테 병원에서 쫓겨났다. 결국 베를린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고 1849년 결혼하러 돌아왔을 때에는 지방 정부가 예식이 끝나는 대로 도시를 떠나라고 했다. 하지만 피르호는 이미 유명 인물이었고 뷔르츠부르크 대학 병리 해부학 교수로 임명된다.

     

     피르호는 중요한 <병리 해부학과 생리학 잡지>를 1847년에 창간하고, 프랑스에서 클로드 베르나르가 그랬듯이 독일에서 새로 주목받게 된 실험 생리학의 유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실험은 병리 생리학의 가장 근원이 되는 영역이다"라고 썼다. 그는 병리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로서 정상 구조에 관한 연구를 창안했다. 체계적인 조사 연구를 수행하고 수많은 전 논문을 발표했으며 1850년대 초에는 세포설과 세포 병리학의 근본 원리를 만들었다.

     

     테오도어 슈반이 1839년에 중요한 세포 이론을 개발한 바 있지만 불완전했 다. 피르호는 그것을 바로잡고 개념적으로 확장하여 많은 세부 사항을 추가했 다. 그는 조직들처럼 근육과 뼈도 세포로 이루어져 있음을 입증하고 많은 해부 학적 사실들을 새로 발견했다. 또 연결 조직이 척수와 뇌의 신경 세포와 섞여서 존재함을 보여 주었으며 세포 조직의 기본 분류 체계도 고안했다.

     

     일찍이 1845년에 세포를 생명체의 근본 단위라 했으며, 1852년에는 세포 분열 과정으로 생식을 설명하는 가설을 세움으로써 아체(芽體)라고 하는 발생 본체를 설정한 슈반의 생각을 부인했다. 마침내 이른바 세포설을 이렇게 정식화한다. 모든 세포는 다른 세포로부터 생겨난다. 피르호는 세포 내부에서 진행되는 화학적 과정을 이해했으며 핵의 중요성도 인식하고 있었다. "성장이 멈추지 않고 계속될 수 있는 것은 어떤 특별한 발생으로도 새로운 성장 과정이 시작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조직을 단 하나의 간단한 요소, 즉 세포로 환원해야 한다"라고 그는 썼다. 그는 세포가 생명체의 기본 단위임을 알았다. 세포는 "모든 살아 있는 요소의 더 이상 환원 불가능한 형태이다. 세포로부터 건강하거나 병든 생명체의 모든 활동이 나온다."

     

     1856년 피르호는 아주 강력한 유인에 이끌려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그가 돌아오는 조건으로 새로운 병리학 연구소를 세우고 그를 소장으로 위촉한 것이 다. 그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여 주는 보기이다. 대단한 영향을 끼친 저서 『세포 병리학』은 피르호가 그 연구소에서 한 연속 강연에서 나왔는데 1858년에 출판되어 2년 만에 영어로 번역되었다. 의사이자 작가인 셔윈 널런 드(Sherwin Nuland)는 이렇게 썼다. "피르호가 『세포 병리학』에서 이룩한 것은 다름 아니라 그 뒤 100여 년 이상 의학 연구가 발판으로 삼은 원리를 표현한 것이다." 세포설과 함께 피르호는 연구의 지평을 생화학과 생리학으로 넓혀 생물학의 더 폭넓은 분야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유전학이 발달하고 생식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세포설은 결국 분자 생물학으로 발전했다. "세포설 이 세상에 나온 것(1858년)이 다윈의 『종의 기원』 (1859년)과 거의 같은 때라는 사실을 놓치는 수가 많다"고 엘로프 칼슨(Elof A. Carlson)은 말했다.*

     

     역사가들이 주목해 온 것은 피르호의 세포 이론이 그의 정치적 태도와 얼마간 관련이 있으리라는 점이다. '제한 없는 민주주의'를 지지한 의사가 세포 이론을 개발한 이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은 "세포 이론의 요지가 동등한 개인으 로 이루어진 자유 국가, 세포 연합, 민주적인 세포 국가임을 보여 준다"고 에르 빈 아커크네히트는 썼다. 피르호는 평생 동안 정치에 적극적이었다. 1862년 프로이센 의회에 선출되어 의회 반대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정적인 오토 비스마 르크가 1865년 그에게 결투를 청해 왔지만 피르호는 빈정거리며 거절했다. 1880년 제국의회 의원으로 뽑혀 1893년까지 활동했고 반유태주의를 표방하는 기독교 사회당과 싸웠다. 피르호는 비스마르크의 부상을 저지하지도, 독일 애국주의의 끔찍한 결과를 막는 데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유능한 공직자로 베를린의 오수 및 하수 처리 체계와 식수 공급을 개선하는데 기여했 다.

     

     그런 정치 견해의 자연스런 결과로 피르호는 나이가 들면서 형질 인류학과 고고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에 흥미를 갖게 된다. 그 학문들이 1870년부터 그의 행동을 지배했다. 갈수록 널리 퍼지는 민족 우월주의에 강하게 반대하면서 단일한 게르만족이라는 가설을 반박하기 위해 학교 아동에 대한 센서스에 착수했다. 그는 고향인 포메른에서 두개골을 발굴하여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을 따라 1878년 트로이 유적 발굴에 나섰다. 그는 실제로 위대한 문명이 번성한 그때에도 야만적인 게르만 부족은 기껏해야 동굴 속에서 살고 있었다고 밝혔다. 한 평가에서 프란츠 보아스는 이렇게 썼다. "독일의 형질 인류학과 선사 시대 고고학은 대개 피르호의 영향과 활동을 통해 이룩되었다."

     

     당연하게도 19세기의 뛰어난 독일 과학자들과는 달리 피르호는 귀족 칭호와 이름에 '폰(von)'을 추가하는 것도 마다했다. 공산주의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일생토록 혁명적 좌파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 사회는 눈먼 오이디푸스와 같이 유감스런 어둠 속으로 갈수록 더 깊게 빠져 든다. 적을 만들고 적의 힘을 강하게 만들며 적이 결국 극단적인 수단을 쓰도록 몰아가면서. 이는 미친 짓이다. 우리 사회 자체를 파괴한다. 그리하여 신탁(神託) 예언을 완 수하는 것이다."

     

     의학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비중을 완전히 자각한 피르호는 말 그대로 행동 가로서 과학과 정치의 일반 문제들에 관해 강연했고, 눈을 감기 전까지 온갖 명예를 한몸에 안았다. 피르호는 전차에서 떨어져 대퇴부가 부러진 뒤 합병증으로 1902년 9월 5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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