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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양자 이론
    THE SCIENTISTS 2024. 3. 29. 17:47

     

     1920년대 중반에 물리학자들은 원자를 눈에 보이는 모델로 만들려는 시도를 단념했다. 반면 양자수를 가지고 수학적 모델을 만드는 데에는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925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는 새로운 양자 이론을 세운 주역이었고, 2년 뒤에는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하여 원자 구성 입자를 측정하려는 모든 노력의 한계를 명확히 했다. 1930년대에는 닐스 보어와 함께 양자 이론에 대한 이른바 '코펜하겐 독트린'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와 함께 양자 이론은 대체로 오늘날에도 타당성을 갖는 완전한 표준을 갖추었다. 나치 시대에 하이젠베르크는 미국행 망명 대열에 끼지 않고 독일에 남는 쪽을 택했다. 독일에서 2차 대전중에 핵분열 연구에 몸담았는데, 과연 그 연구의 궁극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최근까지도 상당한 논쟁의 소지가 되고 있다. 그의 전기를 쓴 데이비드 캐시디(David Cassidy)는 이렇게 썼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20세기의 여명에 태어나 20세기의 매우 탁월한 물리학자가 되었다. 그는 또한 누구보다도 논란의 주역이 되어 온 물리학자이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1901 12 5일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우구스트 하이젠베르크는 비잔틴 제국을 연구한 뮌헨 대학의 교수였다. 어린 베르너는 어머니 안나 베클라인과 아주 가까웠다. 그는 겉으로는 조용했지만 내면으로는 정력적인 기질을 지닌 아이로 자라났다. 이런 기질은 아버지의 강한 성격과 학자적 야심과는 정반대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반영한 것이었다. 1911 9월 외할아버지가 감독하는 이름난 연구소인 막시밀리안 김나지움에 들어가 9년 뒤에 졸업한다. 1차 대전이 끝난 뒤에는 독일 청년 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 바이에른에서 공산주의자가 이끄는 노동자 반란이 일어 났을 때에는 진압을 적극 지지했다. 실제 결과는 의문스럽지만 그 뒤로는 대체로 정치적인 분쟁과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

     

     하이젠베르크는 1920년에 뮌헨 대학에 들어가 마침 좋은 때에 물리학에 입문했다. 1922년부터 막스 보른과 같이 연구했고, 그 해에 괴팅겐 대학에서 닐스 보어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하인 산에서 산책했다. 뒷날 보어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1923년 뮌헨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이듬해 코펜하겐으로 가서 보어의 물리 연구소에서 연구를 계속한다. 그리고 1925년 현대 물리학의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평가되는 행렬 역학을 발전시킨다.

     

     1920년대 초까지 러더퍼드-보어의 새로운 원자 모형에 심각한 문제가 자라고 있었다. 그 모형은 성공했지만 여러 가지 다양한 실험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1924년 하이젠베르크는 빛이나 진동수처럼 측정할 수 있고 관찰할 수 있는 양을 유일한 변수로 하는 이론이 가능한지 따져 보기 시작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뉴턴 법칙에 내재하는 무한성을 허구로 보기로 작정했듯이 하이젠베르크는 개개의 전자를 확실하게 측정할 수 없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데이비드 캐시디는 하이젠베르크와 동료들에 관해 이렇게 썼다. "그들은 양자 도약의 존재와 원자 내부의 불연속성 같은 본질적인 부분은 고수하면 서 볼 수 있는 또는 가시화될 수 있는 원자 모형에 대한 생각은 거부했다."

     

     행렬 역학(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전자를 기술하는데 행렬 대수학을 이용 하기 때문이다)을 발전시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파동 역학이라고 하는 또 다른 모델을 내놓았다. 처음에는 어느 쪽이 옳은지 쉽사리 합의할 수 없었다. 그 후 한 이론은 전자를 입자로, 다른 이론은 전자를 파동으로 파악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두 이론이 수학적으로는 같음이 밝혀진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명백한 모순을 1927년에 출간한 유명한 논문에서 나름대로 해석했다. 양자 운동학과 양자 역학의 직관적 내용에 관하여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과 불가분의 관계인 불확정성 원리를 밝힌다. 한마디로 원자 구성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모두를 완벽하고 정확히 계산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원자 구성 입자의 속도를 더 정확하게 측정할수록 그 위치는 더욱 부정확하게 지정된다. 불확정성 원리는 여러 해 동안 물리학에 통용되어 온 생각, 주로 일상 언어로는 원자를 기술할 수 없다는 생각을 특히 중요하게 여긴다. 원자를 측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그러한 측정에는 인간 지각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불확정성이 내재하기 마련이다.

     

     그 뒤 몇 년 동안 하이젠베르크는 양자 역학의 새로운 '코펜하겐 해석'의 주 된 제안자가 되었다. 닐스 보어 등과 함께 그는 유럽과 미국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 되었다. 1929년 미국을 방문하여 시카고 대학에서 중요한 강연들을 했다. 1927년에서 1941년까지 하이젠베르크는 라이프치히 대학의 물리학 교수로 재직했다. 거기서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 등과 연구하며 양자 전기 역학과 양자장 이론을 발전시켰고, 핵물리학과 고에너지 물리학 연구의 기초를 마련했다. 1933년 에르빈 슈뢰딩거, 폴 디랙과 함께 1932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하이젠베르크는 히틀러 치하의 독일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전쟁중에 핵에너지의 잠재력을 연구했으므로 여러 해에 걸쳐 치밀한 조사를 받았다. 그의 정치적 결정은 애국심과 당시 나치만이 아닌 독일인 모두의 믿음, 히틀러가 2차 대전에서 끝내 승리하리라는 믿음을 보여 준다. 하이젠베르크 자신은 1937년 이데올로기적인 이유로 히틀러 친위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친위대 지도자인 하인리히 히믈러에 의해 무죄를 인정받는다. 아내 엘리자베트 슈마허에 의하면 하이젠베르크는 정치를 '체스 놀이'로 보았다. "거기서는 사람들의 감정이나 정열은 정치적 사건들의 계획된 과정에 따라야 하고, 체스를 두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놀이 규칙을 지켜야 한다.” 그는 1939년 강의 때문에 미국을 여행하던 중 기회가 있었지만 영원히 조국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대신 독일로 돌아가 지방의 요양소를 사서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한 본분을 다하기로 마음 먹었다.

    1942년 베를린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물리 연구소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계속 핵분열을 연구하며 히틀러의 우라늄 계획도 지도했다. 그가 고의로 독일의 원자탄 개발을 막았다는 얘기도 있지만 진상은 명백하지 않다. 닐스 보어가 미국으로 망명하기 얼마 전인 1941년 닐스 보어를 방문해 핵반응에 대해 언급하며 원자로의 윤곽을 그려 냈던 것 같다. 경고인지 허풍인지, 아니면 평화 의지를 공언한 것인지, 하이젠베르크의 의도는 아직껏 불명확하다.

     

     2차 대전이 끝날 즈음 하이젠베르크는 연합국에 체포되어 다른 독일 과학자들과 함께 6개월 가량 영국에 억류되어 있었다. 1946년에야 독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는데 독일에 와서는 후에 막스 플랑크 연구소로 알려진 괴팅겐의 카이저 빌헬름 물리 연구소 소장으로 일했다. 그는 아주 젊은 나이에 중요한 발견들을 했으므로 전후에도 오랫동안 활동했다. 대중적인 과학자로서 유럽 공동 원자핵 연구 회의의 독일 대표단을 이끌었다. 『물리학자의 자연 개념』을 비롯해 자서전인 『물리학과 그 너머』 등 여러권의 저술을 냈다. 1970년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직위를 사임하고 6년 뒤인 1976 2 1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자 동료와 친구들이 그의 집 문 앞까지 촛불을 켜고 행진했다.

     

     노년에 하이젠베르크는 입자 물리학의 주술에서 깨어나 쿼크 같은 소립자에 대한 생각에 개념상의 문제가 있다고 믿고 일종의 통일장 이론을 연구한다. 『과학의 전통』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데모크리토스(Democritos)의 철학과 근본적인 소립자 개념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대신 플라톤 철학에서 나온 근본적인 대칭의 개념을 받아들여야 한다." 실제로 그는 말년에 어려서 가족과 교육을 통해 복합적으로 형성된 유산인 플라톤주의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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