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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클러크 맥스웰과 전자기장THE SCIENTISTS 2024. 3. 26. 11:48
“19세기의 가장 중대한 사건은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James Clerk Maxwell)이 전기 역학의 법칙을 발견한 일로 판가름날 것이다.” 리처드 파인먼이 한 말이다. 수학적인 내용인 전기 역학의 법칙은 여러 가지 복잡한 공식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중요성만큼은 쉽게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맥스웰의 법칙은 전기와 자기를 측정 가능한 단일한 힘으로 합친 것이다. 그에 따르면 빛도 전자기 장의 일부이며 훨씬 폭넓은 스펙트럼 가운데 눈에 보이는 부분이다. 이는 엄청 난 결과를 낳는다. 이 모든 사실로, 또 기체 역학에 관한 연구로 맥스웰이 20세기 물리학을 가장 선명하게 예견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연구는 곧바로 라디오, 텔레비전과 관련된 기술을 가져왔고, 심지어 그는 사이버네틱스(인공두뇌 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맥스웰은 흔히 아이작 뉴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나란히 꼽히며 그의 영향에 관한 한 아무리 높이 추어올려도 지나치지 않다.
제임스 맥스웰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1831년 6월 13일에 존 클러크 맥스웰과 프랜시스 케이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1839년에 암으로 사망하자 여덟 살 난 제임스가 이렇게 울부짖었다. "아, 정말 기뻐! 이제 엄마는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거야." 아버지는 커커드브라이트의 글렌레어에 영지를 가진 지주이자 변호사였고 가끔 발명도 하는 발명가였다.
맥스웰의 어린 시절은 장래의 과학자들에게 일종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와 가까웠고 비범한 기억력을 타고났으며 기계로 만든 장난감을 아주 좋아해서 평생 손에서 놓지 않았다. 1841년 에든버러 아카데미에서 수학 메달을 받았고, 곧이어 아버지를 따라 에든버러 왕립 협회의 모임에 다니기 시작했다. 매우 조숙하여 열네 살에 벌써 핀과 실을 이용해 타원 곡선을 그리는 문제에 관한 논문을 써서 에든버러 왕립 협회에서 출판했을 정도였다. 1847년부터 에든버러 대학에 다녔고, 3년 뒤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갔다. 1854년 졸업한 다음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애버딘의 매리셜 칼리지에서 교편을 잡았다. 1857년 토성의 테를 연구하여 기술했는데, 100년 뒤 우주 탐사선 보이 저 호가 사실로 확인한 내용과 다르지 않았다.
1860년 런던의 킹스 칼리지로 돌아와 거기서 일생 중 가장 정력적으로 일하며 10년을 보냈다. 그는 색채 이론을 정식화하고, 스코틀랜드의 격자 무늬 모직물 리본을 이용하여 최초의 컬러 사진술을 개발했다. 그 해 왕립 협회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0년 뒤 캐번디시 연구소를 만들어 초대 소장으로 취임한다.
전자기장에 관한 연구는 선배인 마이클 패러데이의 연구에서 나왔다. 맥스웰은 패러데이의 생각을 수량화하여 표현했다. 맥스웰과 동시대 사람인 패러데이와 켈빈(Kelvin) 경은 전기가 역학적 모델이 아니라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쉽게 눈으로 보여 주지 못했다. 가령 패러데이의 용어를 빌리면 튜브 같은 '역선(力線)'이 자기 현상에서 떨어진 곳에 미치는 명백한 작용'을 설명 한다. 아이작 뉴턴이 운동하는 물체의 역학을 설명하는 데 많은 방정식을 이용한 것과는 달리, 맥스웰은 역학 모델을 전기 현상을 측정하고 예견하는 다른 모델로 교체했다. 전기는 이제 더 이상 마음속에서나 그려 볼 수 있는 자질구레한 장치로 여겨지지 않는다.
일찍이 1855년 맥스웰은 패러데이의 개념들이 어떻게 일정한 수학적 형태를 취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려 했다. 그의 유명한 해설 「전자기장의 동력학 이론」 이 1864년 대체로 까다로운 왕립 협회 회원들에게 발표되었다. 여기서 그는 처음으로 전자기의 기본 법칙을 이루는 방정식들을 선보였다. 그 방정식들은 어떻게 전하가 정해진 여러 가지 빈도로 공간을 가로지르는 파들을 복사하는지, 또 이때 빈도가 전자기 스펙트럼상에서 차지하는 전하의 위치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맥스웰은 완전한 전자기 스펙트럼의 존재를 예견할 수 있었다. 지금은 전자파, 극초단파(마이크로 기기에 쓰임), 적외선, 자외선, X선, 감마선 따위도 전자기 스펙트럼에 속한다고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맥스웰의 방정식은 전기의 속도를 실험에서 도출된 빛의 속도에 거의 근접한 약 30만 km/sec로 설정함으로써 가장 심원한 결과를 낳았다." 맥스웰은 이렇게 썼다. "그 속도가 빛의 속도에 거의 근사하므로, 빛 자체가 전자기 법칙에 따라 전자기장을 통해서 전해지는 파동 형태의 전자기 교란이라고 결론 내릴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 같다." 1873년 『전자기론』으로 증보 출간 된 「전자기장의 동력학 이론이 얼마만 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는 즉시 파악 되지 않았다. 이유는 주로 그때까지만 해도 전자기의 원자적 성질이 밝혀지지 않은 탓이었다. 이 밖에도 맥스웰은 1860년대에 기체의 조성과 분자의 물리적 성질을 수량화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맥스웰은 주로 특정 온도에서 기체의 분자 운동을 수 학적으로 기술했다. 맥스웰은 토성의 테를 연구하던 1850년대에 이 문제를 처 음 검토하기 시작했는데, 곧 다른 물리학자들이 에너지 보존 법칙과 열역학 법칙인 엔트로피를 발전시켰다. 또한 그가 기체 운동을 연구하며 수많은 물질을 가지고 실험한 것이 장래의 이론적 진보에 밑거름이 되었다. 1860년에 통계학을 이용해서 기체 분자가 운동하는 길을 기술하려는 생각이 떠올랐다. 1867년 「기체의 동학 이론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알려진 기체의 성질이 이론으로 예견한 것과 일치함을 입증했다. 1870년에는 『열 이론』이라는 교재를 출판하기도 했다. 이반 톨스토이 (Ivan Tolstoy)가 쓴 바에 의하면, 그 이론은 “19세기물질관의 기반"이 되었고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이야말로 그의 재능을 보여 주는 진정한 척도이며, 분자 이론에 관한 연구는 심원한 물리적 통찰력의 기념 비라 할 만하다."
맥스웰의 마지막 공헌은 현재의 관심사라는 점에서 밝혀 둘 가치가 있다. 「지배자에 관하여」라는 논문은 20세기 중반에 확립된 피드백 이론의 초석을 이룬 것으로서,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에 가장 근접한 이론이었다. 실제로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키잡이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온 말)는 맥스웰의 용어를 빗댄 것이다.
제임스 클럭 맥스웰은 캐서린 메어리 듀어와 1858년에 결혼했다. 두 사람에게는 아이가 없었으며 전기 작가들이 말하듯 모범적인 가정이기는 했지만 아내는 맥스웰의 동료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그녀는 맥스웰만큼이나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파티에서 그에게 "제임스, 이제 즐기기 시작했지만요,집에 갈 시간이에요"라고 할 만큼. 맥스웰은 오래 살지 못했다. 그는 어머니와 같은 위암으로 1879년 11월 5일 마흔여덟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명성은 그리 확고하지 않았다. 그가 훌륭한 과학자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그의 전자기 이론은 확실하게 입증되지 않았다. 1880년경에 맥스웰을 존경한 헤르만 폰 헬름홀츠는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라는 제자와 함께 맥스웰의 방정식을 확증할 수는 없겠는가를 토론했다. 1888년 헤르츠는 일련의 실험을 통해 전자기파를 생성하고 측 정하여 그것이 어떻게 빛처럼 움직이는 가를 보여 주었다. 그때부터 맥스웰의 명성은 계속 높아갔으며, 빈 사람인 루트비히 볼츠만과 함께 20세기 물리 학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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