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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베르나르와 근대 생리학의 창시THE SCIENTISTS 2024. 3. 27. 10:51
실험 의학의 창시자이자 생리학 역사의 핵심 인물인 클로드 베르나르(Claude Bernard)가 제자에게 이렇게 썼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숨 쉬듯이.”소화에서 췌장의 결정적인 역할, 간의 혈당 조정, 혈관 운동 신경계에 의한 혈관의 수축과 확장 등 근대 의학의 기초를 이루는 이 모든 발견은 단연 베르나르의 공적이다.나아가 실험 자료에서 도출한 생리학의 기본 명제들도 그의 탁월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베르나르는 유기체의 본성을 자기 조절 시스템으로 보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학 연구를 위한 비옥한 구조물을 탄생시켰다. 항상성(恒常 性), 긴장, 생화학적 피드백 같은 현대의 개념들도 모두 베르나르가 처음 창안 한 개념들과 관련이 있으며, 베르나르는 지금도 변함 없는 카운슬러이다. 노벨 상 수상자인 로잘린 옐로(Rosalyn S. Yalow)는 이렇게 쓴 바 있다. "그의 철학은 다양한 학문 분과들의 경계가 새로 나타나고 있는 현대 과학에서 갈수록 중요성을 더해 가는 학제 간 연구의 기초를 제공한다.”
클로드 베르나르는 1813년 7월 12일 보졸레 포도주로 유명한 론 지방의 생릴리앵 근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피에르 프랑수아 베르나르는 포도주 양조업자였는데 이따금 학교 선생을 하기도 했다. 클로드 베르나르는 어머니 잔 솔니에를 무척 좋아했다. 그는 집에서 가까운 빌프랑슈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 다녔다. 한때는 콜레주 드 투아세에서 공부했는데, 과학을 배우지는 않았고 평범한 학과 공부를 했다. 열여덟 살 때 무일푼인 아버지를 돕기 위해 하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약제사의 도제로 들어갔다. 그는 자신이 조제한 약들이 어떤 경우에나 듣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궁금해했다. 뒷날 보게 되는 회의적 태도의 조짐이 이때 처음 나타났다. 그는 평생 신체를 유지하는 물질에 몰두했다.
베르나르는 특이한 경로를 거쳐서 과학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연극에 열중 해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쓴 희곡 『론 강의 장미』가 리옹에서 상연되기도 했다. 그에 힘을 얻은 그는 1834년 파리로 이주해 왔다. 저명한 비평가인 생 마르크 지라르댕이 그의 작품을 보더니 다른 직업을 찾아보라고 권유했다. 베르나르는 그 길로 학사 학위를 받고 파리 대학 의학부에 들어갔다.
베르나르는 의학 공부에서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 졸업할 때에도 학과에서 29명 중 26등으로 바닥을 면치 못했다. 그런데 프랑수아 마장디(François Magendie)의 강의를 듣고 장래가 바뀌었다. 마장디는 잘 알려진 생리학자이자 신경학자로서 이론에 의구심이 많은 투철한 탐구 정신의 소유자였다. 베르나르는 곧장 기성 의학 이론을 의심한 마장디의 진가를 알아차리고는 그를 찾아가 보수 없이 실험 조수로 써 달라고 부탁했다. 그 이후로 베르나르의 공책에는 그가 당대의 의학 지식을 얼마나 의심했는가가 나타나게 된다.
베르나르는 1843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결코 의사로 개업하지는 않았다. 후대의 많은 연구자들처럼 그도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데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베르나르의 경우는 이것이 최초의 골칫거리였다. 왜냐하면 그때까지의 이력 가지고는 학자가 되기에도 부적격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소화 과정과 신경계의 작용을 연구하기 전까지 마장디의 조수로 있었다. 그 덕에 해부에는 몹시 능숙해졌다.
베르나르가 초기에 가장 관심을 쏟은 것은 소화 과정이었다. 1848년에 췌장이 지방을 소화하며 췌장이 없다면 죽는다는 것을 입증했다. 윌리엄 보몽 (William Beaumont)이 알렉시스 생 마르탱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베르나르는 매우 중요한 실천적 소득을 얻었다. 마르탱은 총상을 입어 늑골과 위에 구멍이 났는데도 소화할 수 있었다. 동물 실험에서 베르나르는 관찰할 양으로 누(궤양이나 상처로 생긴 구멍)나 인공적인 구멍을 만들었다. 이 방법으로 19세기 생체 해부 반대론자들의 격분을 샀지만 만족스러운 효과를 얻었다. 베르나르는 췌장만이 아니라 소장도 소화에 관여함을 알아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베 르나르는 호흡 과정에서 산화를 발견한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의 연구를 더욱 확대했다. 그는 산화 반응(연소)이 신체 내 모든 조직에서 일어난다고 보고, 대사 작용을 통해서 영양소를 소화·흡수하는 더 넓은 맥락에서 소화를 겸 토한 최초의 인물이다.
1848년 베르나르는 간이 규칙적으로 당(糖)의 한 형태인 글루코오스를 피로 분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음 10여 년간 글루코오스의 저장 형태인 글리코겐을 추출했다. 이러한 발견들은 그의 위대한 업적으로 널리 평가되고 있다. 조제프 프뤼통(Joseph Fruton)이 관찰했듯, "그것들은 당대인들에게, 또 훗날의 생리학과 생화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855~1856년 그는 두권 으로 된 『실험 생리학을 응용한 의학에 대한 강의』 초판을 출간했다.
뿐만 아니라 베르나르는 신경계에 관해서도 중요한 발견을 많이 했다. 귀를 설명하면서 두개골 신경도 함께 설명했다. 그는 또한 혈관의 수축과 이완을 통제하는 혈관 운동 신경계도 설명했다. 신경계와 관련한 또 다른 연구 때문에 독성 물질도 실험하여, 일산화탄소와 스트리크닌이 어떻게 죽음을 초래하는지 입증했다. 이 작업을 통해서 마취법에서 중요해진 독성 물질 큐라레(열대성 식 물에서 채취되며 운동 신경을 마비시킨다)의 메커니즘도 얼마간 이해하게 되었다. 이로써 베르나르는 실험 약리학의 창시자로도 알려졌다.
1857년경 베르나르는 인생에서 새로운 완숙기를 맞는다. 그는 자신의 발견 들을 뒷받침하는 생리학의 일반 원리를 발전시켰다. 『실험 의학 연구 입문』이 1865년 출간되었다. 2년 뒤에는 '내부 환경' 개념을 기초로 생리학의 통합 이론을 밝힌 소책자를 출간한다. 여기서 베르나르는 신체는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신경계에 의해 조절되는 안정적인 내부 환경을 만들어 외부 세계에 대해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탁월한 일반화를 이룩했다. 베르나르는 화학적 신경 전달 물질을 구상한 적도 없고 내분비계도 알지 못했지만, 그의 내부 환경은 20 세기에 월터 캐넌(Walter Cannon)이 발전시킨 항상성을 예시한다. 스트레스 개념을 발전시킨 한스 셀리에 역시 베르나르에게서 은혜를 입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외부 환경이 변해도 살아 있는 유기체의 내부 환경은 변함없이 유지된다고 명백히 지적한” 사람이 베르나르 였다고 썼다.
만년에는 온갖 명예를 한 몸에 받았다. 1867년에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고, 1869년에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에 나폴레옹 3 세 통치하의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는데 당시 상원은 정부 정책을 덮어놓고 지지하는 거수기 노릇을 했다. 결국 1870년 보불 전쟁이 일어나자 파리에서 도망해야 했다.
클로드 베르나르의 사적인 일생은 아주 불우했다. 그는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1845년에 마리 프랑수아즈 마르탱이란 돈 많은 여성과 애정 없는 결혼을 했다. 두 아들은 어릴 때 죽었으며 두 딸은 어머니를 따라서 그를 멀리했다. 베르나르의 동물 실험에 넌더리가 난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말년에는 파리 출신 은행가의 아내인 마리 라팔로비치와 정신적인 교제를 했다. 그녀는 베르나르의 마지막 몇 해 동안 편안함과 우정을 선사했다. 불가지론자였던 자신의 바람 과는 달리 마지막 의례를 받게 된다. 1878년 2월 10일 세상을 떠났고 프랑스에서 과학자로는 처음으로 국장에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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