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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보아스와 근대 인류학THE SCIENTISTS 2024. 3. 28. 15:38
근대 인류학의 아버지이자 20세기 중반 인류학의 탁월한 위인이 프란츠 보아스(Franz Boas)이다. 그는 60여 년에 이르는 일생 동안 너무도 많은 업적을 쌓았다. 보아스는 여행담에 불과하던 인류학에 종지부를 찍고, 세심하게 수집한 정보와 폭넓은 인간주의적 목표를 가지고 과학적인 탐구로 나아가는 길을 개척했다. 철두철미한 다원론자요 반권위주의자인 그의 작업은 민족과 문화적 상대론에 관한 과학의 기본적인 진술로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보아스는 문화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식하여, 오늘날 발전하고 있는 인지 과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이렇게 썼다. 보아스는 "19세 기의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그가 이룩한 업적은 많다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 다양하기 때문에도 존경할만하다. 형질 인류학, 언어학, 민족지학, 고고학, 신화학, 민속학 등등, 그에게는 낯선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작업은 인류학의 영역 전반에 두루 미쳤다. 미국 인류학이 모두 그에게서 나온다."
프란츠 보아스는 1858년 7월 9일, 지금은 독일에 속하지만 당시에는 프로이센의 한 지방이었던 베스트팔렌의 민덴에서 태어났다. 여섯 형제 중 외아들이었고 형제들 중 셋은 어른이 되기 전에 죽었다. 아버지 마이어 보아스는 돈 많은 상인이었고, 어머니 소피 마이어는 열렬한 사회 활동가로 지방에 프뢰벨식 유치원을 세웠다. 자유 사상을 따르는 유태인 가정에서 자유롭게 성장한 프란츠는 허약하고 병치레가 잦은 소년이었다. 1877년부터 하이델베르크, 본, 킬 등지의 대학에 다녔고, 1881년 킬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박사 논문의 내용은 색채 지각 능력의 문제로 '정신 물리학 분야였다.
학창 시절에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t)와 다를 바 없이 19 세기 초 같은 독일인인 자신에게서 여행욕과 탐험열을 발견했다. 군 복무를 마친 뒤인 1883년 보아스는 캐나다 북극 지방의 배핀섬으로 탐험 여행을 떠나 그곳에 사는 에스키모인들을 만난다. 애초 의도는 그 지역 지도를 개선하려는 것이었는데, 돌아올 무렵에는 관심사가 크게 확장되어 그곳의 문화 전반에 흥미를 갖게 된다. 보아스는 전에 '복잡한 현상에 대한 지적 이해인 지각 작용에 매료되었듯이 새로이 인간의 행태에 관심이 쏠렸다고 그때 일을 회고했다. "관심사가 지리학에서 민족학으로 바뀌었을 때, 역시 똑같은 흥미가 내 마음을 지배했다"고 썼다. 몇 년이 지난 1888년 『중부의 에스키모』를 출간한다.
북극 여행에서 돌아와 뉴욕에 체류하면서 아주 좋은 인상을 받았다. 학자들의 자유로운 생활은 독일 학계와 대조되어 더 두드러져 보였고 반유태주의에 얽매일 일도 없었다. 결국 독일에서 한 학기 강의를 한 다음, 1887년<사이언스> 지를 위해 일하기로 하고 저널리스트로서 왕성하게 활동한다. 몇 년 동안 대중적인 저술 작업과 전문 연구를 병행했다. 1890년대에 필생의 목표를 세우기 시작한다. 학계로 돌아와 인류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1888년에서 1892년까지 4년 동안 클라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894년에는 시카고 필드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되었다. 1896년에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의 부(副) 큐레이터가 되었고, 1901년 큐레이터로 승진했다. 거기서 그는 야심만만한 제섭 북태평양 탐험대를 지휘했다. 탐험대의 목표는 언어, 문화, 관습, 민족의 상호 관련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이었다.
1899년 컬럼비아 대학의 인류학 교수로 취임해 38년간 재직했다. 컬럼비아대학 교수 자리는 인류학의 과학적 지위를 높이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보아스는 인류학 분야에서 자신이 반대한 과학주의와 '진화론적' 인류학 같은 자칭 아마추어들을 배척하는데 관여했다. 진화론적 인류학은 유럽 민족들을 문명의 종착지이자 정점으로 보았다. 보아스는 계량할 수 있는 데이터를 요구했지만, 인류학은 결코 자연 과학 같은 정확성을 충족할 수 없음을 모르지 않았다.
1888년에는 북태평양 해안 지방에 사는 크와키우틀 인디언에 대한 현장 조사에 착수했다. 결국 그 연구로 영국의 컬럼비아를 열세 차례나 여행했다. 그가 크와키우틀 민족학을 다룬 책을 쓴 적은 없지만 광범위한 기록으로 인류학 연구의 중요한 모범을 제시했다. 보아스는 원시 부족을 연구하려면 세심하게 수집한 가공품들과 역사, 언어, 관습, 자연 환경을 포함한 문화를 모든 측면에서 자세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비교 방법을 주창하여 문화적 차이 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추적하기 위해 이웃 부족들도 함께 연구했다. 집요하게 다방면에 걸쳐 자료를 축적한 결과 일반적인 진술을 명확히 할 수 있었고, 그것이 문화 진보의 법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가 방대한 양의 자료를 모으기만 했지 분석하지는 않았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보아스가 역설한 세부 사실의 중요성은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마거릿 미드 (Margaret Mead),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랠프 린턴(Ralph Linton) 등도 있었다.
1911년 보아스는 『원시인의 마음』을 출간했다. 그 책은 획기적인 강연들에 서 발전한 것인데, 그는 어떤 민족을 다른 민족과 구분한다고 주장되는 특징들이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열등한 민족이라는 관념을 공격했다. 마셜 하이어트(Marshall Hyatt)는 이렇게 썼다. “과학이 사회 진화론에서 벗어나 평등한 권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근본적으로 이동하는데 그 이상 기여한 인류학자는 없다. 가짜 과학자들이 흑인이 열등하다는 이론을 입증하여 과학을 독점하는 그런 사태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이성에 의거하여 인종주의를 공박하고 미국 흑인들을 옹호한 것은 보아스 특유의 사회 활동과 전문 연구의 관계를 보여 준다."
미국 흑인 연구에 맞추어 보아스는 원주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해 오는 ‘뇌가 더 작은 민족들'로 가정된 집단과 관련하여 형질 인류학 분야의 조사단을 조직했다. 고등한 종족으로 자처하는 미국인들은 과학을 시끌벅적한 싸움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보아스는 미국 이민 위원회의 요청으로 유럽 이주민 가계를 연구했다. 당시 민족 간에 가정된 차이를 측정하는 여느 과학자들의 연구 수단을 이용하여 이민 집단들에 상당한 적응성이 있음을 알아냈다. 이민 첫 세대 안에 신체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예를 들어 보아스의 조사에 따르면, 머리형이 길쭉한 이민자들이 미국에 정착한 다음 머리형이 더 납작한 아이를 낳았다. 우선 보아스의 측정 결과에는 민족들 간의 커다란 차이를 입증하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고향에서 가장 영속적인 것으로 입증된 민족의 특징들조차도 새로운 환경에서 그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의 보고서 『이민자 후손들의 신체 형태 변화』가 1911년 미국 정부에 의해 간행되었다.
인류학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다양한 분야로 발달하여 여러 방법론과 시도가 주목을 끌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하지만 보아스의 전반적인 영향력, 그리고 인류학이 과학적 담론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한 바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특히 그가 언어 분석을 강조한 것은 오늘날에 와서 가장 두 드러지 고 있다. 『미국 인디언 언어 편람』이 처음 간행된 것이 1911년인데, 거기서 표명된 그의 견해는 비할 데 없이 많은 성과를 낳았다. 레너드 블룸필드(Leonard Bloomfield)는 확신을 갖고 보아스가 “거의 혼자 힘으로 음성학과 구조 기술을 갈고닦았다고 생각했다. 또 조지 스토킹(George W. Stocking)에 따르면 보아스는미국 언어학의 여러 방법과 가정의 구조를 변혁했으며 서술 언어학에서 근 대적 전통의 시발점이 되었다."
보아스의 인생과 경력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친절하고 출중한 그는 마리 크라코비처와 결혼하여 여섯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둘은 어른이 되기 전에 죽었다. 아내 또한 1929년 자동차 사고로 숨졌다. 1차 대전 동안 보아스의 명성은 그가 미국의 참전을 지지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손상되었다. 그 결과 미국 인류학 협회 회장직을 잃었으며, 잠시 회원 자격도 박탈당했다가 후에 복권되었다.
1942년 12월 21일 보아스는 컬럼비아 대학의 교수 클럽에서 열린 오찬회에 참석했다. 나치가 점령한 프랑스를 빠져나온 프랑스 인류학자 폴 리베를 위한 오찬회였다. 루스 베네딕트와 랠프 린턴도 손님으로 와 있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보아스가 "60년 전에 에스키모 지역을 탐험하던 때부터 써 온 게 분명한 낡은 모피 모자를” 쓰고 도착했다고 기억했다. 한창 즐거운 토론이 무르익어 가는 중에 프란츠 보아스가 갑자기 쓰러졌다. 보아스는 자기 손으로 책상을 밀치고는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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