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마이클 패러데이와 고전적 장 이론
    THE SCIENTISTS 2024. 3. 23. 12:21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9세기 화학의 일대 변혁을 주도하면서 마침내 전기와 자기, 빛에 관한 새롭고 근본적인 이론을 만든 인물이다. 자연의 통일성을 감지한 예민한 몽상가이자 완벽한 실험가였던 패러데이는 최초로 전자기장 개념을 만들었다. 전자기장 개념은 후에 제임스 클럭 맥스웰이 수량화했다. 패러데이는 다방면의 업적으로 물리학과 화학의 역사에서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말이지 그는 성서에 나오는 모세를 닮았다. 모세는 자기 민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지만 그 땅을 밟아 보지는 못했다. 패러데이는 수학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복잡하게 수량화된 이론을 제시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마이클 패러데이의 어렸을 적 이야기는 산업 혁명에 걸맞은 한 편의 동화 같다. 그가 태어난 것은 1791 9 22일 서리의 뉴잉턴버츠에서이다. 그곳은 현재 런던의 엘러펀트와 캐슬이다. 아버지 제임스 패러데이는 대장장이였는데, 몸이 안 좋아 아내와 네 명의 자식을 먹여 살리기도 버거웠다. 하지만 가족은 아주 화목했고 자식들을 사랑하면서도 엄하게 키웠다. 패러데이에겐 어머니 마거릿 하츠웰이 더 든든했고, 1809년 아버지가 죽은 뒤로는 유일한 어버이였다.열세 살 때인 1804년 최소한의 교육을 받은 패러데이는 어떤 프랑스 망명 왕당원을 위해 신문 일을 시작하는데, 뒤에 제본공으로서 그 사람의 도제로 들어간다. 그로부터 7년간 훗날 그를 위대한 실험가로 만든 손재주를 다듬어 간다. 한편으로는 자기가 표지를 입히는 책들에서 지식도 쌓았다. 특히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정신의 개선』이라는 제목의 독학 교재를 감명 깊게 읽었다. 1810년 그 지방의 시() 철학 학회가 여는 강연을 듣기 시작했고 2년 뒤에는 그보다 훨씬 더 이름난 왕립 연구소의 강의를 듣게 된다.

     

     1813년 패러데이는 왕립 연구소에서 알게 된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 경의 조수로 견습 시절을 시작하는데, 여기서 놀랄 만큼 많은 일을 하게 된다. 역시 보잘것없는 배경을 가진 데이비는 중요한 초창기 과학자이다. 그는 시인 로버트 사우디가 쓴 것처럼 아산화질소로 '불이 들어오게' 하는 방법을 발견 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패러데이는 1813년 데이비를 따라 유럽을 여행하면서 알렉산드로 볼타(Alessandro Volta), 앙드레 앙페르(André Ampère)를 비롯해, 화학자인 조제프 게이 뤼삭(Joseph Gay-Lussac) 등 당대의 중요한 과학자들을 두루 만난다. 그 뒤 데이비의 연구에 적극 참여해서 광부들을 위해 안전 램프를 만들고 원시적인 저온 물리학 실험도 거들었다. 실제로 공은 데이비에게 돌아갔지만, 1823년 패러데이는 탄산 가스와 염소를 포함해 몇 가지 중요한 기체를 액화하는 데 성공한다. 중요한 발전이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기체가 한 가지 이외의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년 뒤 패러데이는 고래 기름에서 벤젠을 분리해 냈다. 이는 40여 년이 지난 다음 유기 화학의 발전에 실마리가 된다. 그 밖에도 렌즈로 쓰는 유리를 개량하고 패러데이 효과를 발견했다. 패러데이 효과란 자기장을 통과할 때 빛의 편광면이 회전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1820년대에 패러데이가 발견한 것들은 핵심적인 의의를 갖는 이례적인 업적이었다. 그러므로 1824년 패러데 이가 왕립 협회 회원으로 선출된 것은 당연하다.

     

     전기적 현상은 18세기 초창기 과학자들의 관심사였으며 1799년 알렉산드로 볼타가 간단한 전지를 발명한 것이 전환점이 되었다. 하지만 훌륭한 실험은 1819년에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Hans Christian Oersted)가 전기와 자기의 관계를 입증한 일이다. 이를 시발로 10여 년간 그러한 활동이 폭발적으로 이어졌다.패러데이는 막대자석이 전기가 흐르는 철사 둘레를 돌게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또 같은 이유에서 전기가 통하는 철사를 공중에 띄워 놓았을 때 철사가 고정된 막대자석 주위를 돌았다. 실제로는 이로써 전기 에너지가 역학 적 에너지로 바뀌는 변화를 처음으로 입증했다. 9년 뒤인 1830년 데이비의 뒤를 이어 화학 부문의 책임자가 된 패러데이는 연구의 초점을 전기와 자기 작용으로 옮겨 자신의 가장 뛰어난 발견들을 해낸다.

     

     1831년 가을 패러데이는 전자기 유도를 입증한다. 최근의 기사에서 한마디로 요약했듯이 이 사건으로 패러데이는세계의 역사를 바꾸고 인류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여기에는 많은 실험이 포함되는데, 그 중 결정적으로 중요한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우선 1831 8월 패러데이는 철심 둘레를 분리된 두 가닥의 철사로 감았다. 한 가닥은 자석으로 된 나침반을 지나게 했다. 그가 다른 한 가닥을 전지에 연결하자 나침반의 자침에 변화가 일어났다. 패러데이가 썼듯이 "한순간만 이어졌다.” 하지만 거기서 패러데이는 변압기의 원리를 간파했다. 왕립 협회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한 손에 유도 코일을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직류에 관해 말하면, 패러데이는 '힘의 튜브'로 이루어진 전기장 안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동을 인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반형 자기 발생기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 그는 자기 발생기 중앙에 고정된 철사를 설치하고 구리 원판의 가장자리를 철사로 감았다. 철사를 검류계에 연결하고 원판을 말굽 자석 사이에 놓아 끊이지 않고 고른 전류를 발생시킬 수 있었다. 1821년에 전기 에너지가 어떻게 역학적 에너지로 바뀔 수 있는가를 보여 주었듯이, 1831 10 월 패러데이는 그 반대도 가능함을 입증했다. 이것이 최초의 발전기 또는 자기 발생기인데, 발전기는 반세기 뒤에 현대 세계에 전기 에너지를 전해 주는 주요 수단이 되었다. 패러데이는 실험을 위해 계속해서 원시적인 발전기와 전동기를 만들었다.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수상이 실험실에 찾아왔다가 그가 만든 발전기의 용도를 묻자 패러데이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저도 모릅니다만 언젠가는 꼭 당신의 정부에 세금을 내겠습니다."

     

     전자기 유도의 발견으로 패러데이는 무수한 실험을 하는 한편, 후속 연구의 초석을 놓았다. 실제로 1832년 패러데이는 전기 화학을 창시했다. 전기 화학은 전류를 가지고 화학적 화합물을 분해하는 과정을 다룬다. 그는 이제 전기 분해를 지배하는 법칙을 발전시켰고 그것으로 명성도 얻었다. 또한 전기와 여러 요소의 합성 사이에 근본적인 관계가 있음을 입증했다. 패러데이는 윌리엄 휴얼 (William Whewell)과 함께 전기학의 기본 용어도 만들었다. 전해질, 전극, 양극, 음극, 이온 등 기타 여러 가지 용어들이 그의 연구 결과로 생겨났다. 패러데이의 연구는 세 권으로 된 『전기에 관한 실험 연구, 1839~1855」와 1859년에 출간된 『화학과 물리학의 실험 연구』에 집약되어 있다.

     

     실제로 전자기 유도와 전기 분해의 법칙을 실험으로 입증한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패러데이의 이론적 공헌이다. 그는 앞선 세대에 발견된 여러 가지 전기들, 즉 열화학, 정전기, 전자기, 볼타 전기 등이 실은 같은 것임을 최초로 보여 주었다. 이리하여 패러데이는 전기적 현상들로부터 모든 자연의 근저에 놓인 통일성을 이해하는 길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확신에 차서 이렇게 썼다. "여러 가지 물질을 명확히 해주는 다양한 형식들은 한 가지 공통된 기원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그 형식들은 직접 관련을 맺고 있고 자연스럽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것으로 전환할 수 있으며 동등한 운동력을 갖고 있다.” 1846년에 쓴 「빛의 진동에 관한 생각」은 뒷날 맥스웰이 더 발전시켜 전자기의 근본 법칙과 전자기장 이론을 개발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1839년 패러데이는 중병을 앓았는데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그 의 병에 대해서는 이후 진단이 무수히 나왔지만 아마도 피로에 의한 것 같다. 두통이 심했고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나빠져 고통받았다. 그렇지만 만년에 는 숱한 영예를 받고, 정통한 고문관으로서 정부를 위해 여러 가지 과학 관련 사안들에 대해 조언했으며, 빅토리아 여왕에게서 '은총과 은혜의 저택'을 하사받기도 했다. 빅토리아 여왕의 자식들은 해마다 패러데이의 크리스마스 강 연에 참석했다. 얼마나 명성이 자자했던지 한 번은 바이런 경의 영양인 러브레 이스가 그에게 실험을 한 번 더 해 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패러데이는 1821년 사라 버나드와 결혼했다. 사라는 온화하고 밝은 명랑한 사람이었는데, 가까운 친지들과 남편이 그녀의 모성 감정을 우려했다고 한다. 패러데이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던 것이다. 종교적으로는 산더마니안파로 독실한 신자였다. 간소함에 대한 경건한 집착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뉴턴과 다른 위대한 과학자들과 나란히 묻히지 못했다. 그는 1867 8 25일 미 들에섹스의 햄프턴 궁에서 눈을 감았고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혔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