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와 화학 혁명
    THE SCIENTISTS 2024. 3. 21. 11:05

     

     근대 화학의 아버지는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Antoine Laurent Lavoisier)이다. 그가 한 연구와 그의 운명은18세기말 유럽이 사고와 일상생활에서 어떤 혁명을 치렀는지 보여 준다. 라부아지에는 산소가 연소 반응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설명했고 원소를 기본 물질이란 개념으로 파악했으며 화학반응에서 물질의 보존 원리를 규정하는 등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더글러스 매키(Douglas McKie)에 따르면, 라부아지에는 『화학 요론』으로 "뉴턴이 100년 앞서 『프린키 피아』로 역학에 기여한 바를" 화학에서 이룩했고, 그의 연구는 산업 부흥에 기초를 마련했다. 주요 과학의 창시자들과 마찬가지로 라부아지에는 정량 분석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그래서 정밀한 기구를 마련하는데 막대한 돈을 썼다. 1793년 혹독한 프랑스 혁명기의 어느 날 급진파 당원들이 체포하러 왔을 때, 라부아지에는 조수에게 숨쉴 공기구멍 하나만 있는 실크로 된 가방을 덮어씌우고는 호흡과 발한 작용을 실험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출처는 미심쩍다. 그는 프랑스 혁명기 공포 정치 때 재판을 받고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는 변호사인 장 앙투안 라부아지에와 에밀리 풍크티 의 맏아들로 1743 8 26일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 출신인 어머니가 1746년 에 세상을 떠나자 앙투안은 반할 만큼 멋진 이모 클레망스 풍크티 손에서 자랐다. 파리에서 성장하여 9년 동안 권위 있는 마자랭 콜레주를 다녔다. 마자랭 콜레주는 이학 과정으로 유명했지만, 그는 법학을 공부하여 1763년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법률가 훈련을 받은 덕에 언변이 뛰어났고 당대의 과학 이론에 의혹을 품게 되었다. 게다가 개인적 야심마저 적지 않았다.

     

     학창 시절에는 과학에 끌려 '자르댕 뒤 루아(왕의 정원)'에서 식물학 기초를 배웠고, 1762년 무렵부터는 기욤 프랑수아 루엘(Guillaume-François Rouelle)의 화학 강의를 들었다. 뉴턴이 쓴 『프린키피아』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디드로 (D. Diderot)의 『백과전서』에서 화학 부분 등을 자료로 삼았다. 1763년에는 그 의 가족과도 절친한 사이인 지질학자 장 에티엔 게타르(Jean-Etiene Guettard)를 따라 프랑스 전역을 도는 긴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프랑스에 분포하는 광물의 목록을 만드는 것이 여행의 임무였다. 프랑스 왕이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 혁명을 두려워했기에 그런 여행이 계획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죽기 전까지라 부아지에의 인생 역정은 프랑스에서 낡은 질서가 해체되고 산업과 자본주의가 발생하는 과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1765년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아카데미에 파리에서 회반죽을 만들 때 쓰던 석고의 성질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듬해에는 파리의 가로를 밝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이론적으로 다루어 프랑스 아카데미로부터 금메달을 받았다. 이 무렵 재정적으로 독립했다. 물려받은 유산도 많았고, 왕을 위해 세금을 거둬들이는 개인 출자 회사인 징세 청부 조합에 참여했다. 조합은 가혹한 처사와 부패로 많은 이들에게서 혐오를 받았다.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자인 라부아지에는 뒷날 이 조합에 참가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고초를 겪게 된다. 1771년 열네 살의 마리 안 피에레트 폴즈와 결혼했다. 그녀는 나중에 연구소에서 그림을 그려 주고 영국 과학자들의 논문을 번역해 주는 등 조교 노릇을 톡톡히 했다. 두 사람에겐 아이가 없었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고 프랑스의 지식인 사회에서 유명해졌다. 화가인 자크 루이 다비드가 두 사람을 모델로 그린 그림도 유명하다.

     

     1768년 프랑스 아카데미의 공식 회원이 되어 20여 년 동안 여러 방면에 걸쳐 수많은 문제들을 연구했다. 파리 주민의 식수 공급. 식품 저질화의 문제, 동물의 자성(磁性), 감옥의 환경 등도 포함된다. 어떻게 염색이 되며, 금속은 어떻게 녹스는지, 장기간 항해하는 배에 어떻게 하면 물을 저장할 수 있는지, 또 유리 제조를 개선할 방법은 무엇인지 등은 라부아지에가 참여한 200여건의 보고서들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1775년 탄약 위원회에 임명되어 바스티유 근처의 병기창으로 옮기고 주도면밀하게 고안한 실험실을 설치했다.

     

     라부아지에의 과학적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또 그의 재능이 사회사와 얼마나 깊이 관련되었는지는 파리 주민의 식수 적합성 같은 그의 실용적인 연구들을 보면 분명해진다. 개방 수로를 따라 파리로 들어오는 물이 만족스러울만치 깨끗한지 여부를 검토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라부아지에는 증류시킨 뒤 남는 고형 물질을 조사했다. 그러나 그런 분석 과정에서 물이 불순물을 포함할 수 있음을 깨닫고, 그리하여 그것이 그저 흙으로 바뀔 수 있다는 이론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772년경에는 모든 물질은 고체, 액체, 기체의 세가 지 상태를 띨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기체 상태는 화학반응에서 물질의 보존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라부아지에는 중요한 이론적 시도를 하기에 이른다.

    실제로 라부아지에의 업적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것은 연소를 새롭게 이해하고 그 결과 산소를 발견한 일이다. 17세기에 플로지스톤이라는 가설적 물질이 사물이 어떻게 타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으로 가정되어 왔고 나중에 많은 다양한 화학반응을 해석하는 데 원용되었다. 플로지스톤은 모든 가연성 물질에 포함되어 있고 불에 탈 때 연기와 불꽃으로 빠져 나간다고 여겨졌다. 가령 숯(목탄)은 주로 플로지스톤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용해되는 동안 원광(광석) 에도 들어가게 된다고 보았다. 금속은 불에 탈 때 산화하여 오히려 무게가 늘어나는데, 이런 반박 증거는 무시하거나 우회적으로 설명하고 말 따름이었다.

     

     라부아지에는 유황, 인 등의 화합물로 실험한 다음 1772년 프랑스 아카데미에 맡긴 노트에서 다음과 같은 새로운 가설을 제시했다. 즉 연소 과정에서 플로지스톤은 발생하지 않으며 오히려 불에 타는 물체가 공기를 흡수하고 또 공기를 필요로 한다. 전적으로 옳진 않지만 라부아지에는 여기서 영감을 얻어 다른(주로 영국) 화학자들이 이미 여러 가지 공기로 행한 바 있는 중요한 연구를 검토하게 된다. 그들은 일산화탄소, 질소, 염화수소 같은 물질들을 발견했다. 1773년 라부아지에가 썼듯이 그는 "연소에 들어가고 물질에서 빠져 나오는 그 공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다른 지식의 성과와 결합하고 이론을 만들기 위해" 앞서 행해진 실험들을 되풀이하기로 계획 했다. 1774년 이러한 연구의 결과가 『물리와 화학 소론』으로 출간되었다.

     

     그리하여 그 실험을 한 지 4년 만인 1778년 산소에 이르게 된다.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의 연구도 일조했는데, 프리스틀리는 수은을 연소시킨 후에 남는 재 모양의 물질을 가열하여 얻어진 '플로지스톤이 제거된 공기'의 독특한 성질을 인식했다. 프리스틀리가 플로지스톤 이론을 고수한 반면, 라부아지에는 '공기의 가장 활력 있고 가장 순수한 요소'를 산소로 정의할 수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산성의 해석이란 맥락에서 연구했으므로 그 물질을 '산 생성물'이란 뜻에서 산소라 이름 붙였다. 밝혀진 대로 잘못된 명칭이지만 그 이름이 그대로 쓰였다. 더 중요한 것은 라부아지에가 산소가 금속과 반응하여 산화물을 형성하며 비금속과 반응하면 산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일이다. 금속이 녹슬고 동물과 채소가 부패하고 나무가 불에 타는 것도 모두 산화 과정의 사례이다. 또한 라부아지에가 입증했듯이 연소는 공기 중의 산소가 흡수되고 반대로 이산화탄소가 배출되는 호흡에서 기본이 되는 화학 과정이다.

     

     라부아지에는 물의 조성을 발견한 인물로도 지목되곤 한다. 하지만 이 발견은 조지프 프리스틀리,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 제임스 와트(James Watt) 등 영국 과학자들이 우선권을 주장하는 바람에 궁지에 몰린다. 영국과학자들은 어떻게 해서 산소와 수소가 전기 스파크에 의해 결합하여 일종의 이슬로 바뀌는지 알고 있었다. 그 이슬 방울이 다름 아닌 물인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라부아지에가 처음으로 물의 성분을 산소와 수소라고 올바르게 정의했다.

    앞서 말한 내용에서 분명해졌지만 라부아지에는 원대하고 야심 찬 계획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의 발견이 완전히 새로운 과학 분야를 창립했다고 보았다. 그는 말과 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고, 자신의 목표를 확대하여 잡지 <화학 연보>를 창간했다. <화학 연보>는 지금까지도 발행되고 있다. 1787년 출 간한 『화학 명명법』에서는 화합물의 주요 속성과 조성을 연상시키는 화합물의 명명 체계를 만들고 기호 체계도 고안해 냈다. 처음에는 영국과 독일 과학자들 이 반대했지만 거의 바뀌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789년의 『화학 요론』은 화학적 화합물이 성분들로부터 형성되는 기본 원리와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화학 반응에서 물질이 보존된다는 정리로 인해 『화학 요론』이 완전히 근대적인 저작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과학을 보는 관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이외에는 믿어서는 안 된다. 사실이야말로 자연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사실은 또 기만할 수도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의 이성보다 실험이라는 테스트를 우위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아울러 라부아지에는 기구와 기술 때문에 생겨나는 한계 또한 인식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원소들을 영원히 단순한 물질이라고 가정하지 않았고, 다만 '우리 지식의 현재 상태'에 의해 더 이상 분해될 수 없는 원소라고 여겼다.

     

     라부아지에는 『화학 요론』을 증보하여 비교적 짧고 쉽게 읽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프랑스 혁명을 위해 한일이 되고 만다. 혁명 초기의 대의를 지지한 계몽주의자였지만, 징세 청부인으로 구체제에서 득을 본 데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적인 장 폴 마라가 1793년의 테러로 단번에 권력을 잡았다. 라부아지에는 그 해 말에 체포되어 이듬해 봄 서른 명의 다른 징세 청부인과 함께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는다. 그의 과학적 업적에 재판정의 관심이 모아졌을 때, 직판관인 코핀할이 "공화국에는 과학자가 필요 없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코핀할 역시 나중에 처형된다. 조지 코프먼(George B. Kauffman)에 따르면 이 말은 출처가 의심스럽다. 하지만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1794 5 8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뒤, 수학자 조제프 루이 드 라그랑주(Joseph Louis de Lagrange)는 이렇게 말했다. “그 머리를 잘라 버리는 일은 한순간이지만, 그 같은 인물은 100년이 걸려도 나오기 어려우리라.”.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