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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크문트 프로이트와 무의식의 심리학
    THE SCIENTISTS 2024. 3. 20. 11:22

     

     19세기 말경 과학, 기술, 의학의 진보가 서구 문명에서 남성과 여성의 주관적인 내면 생활의 커다란 변화를 예고했다. 산업 혁명과 도시화, 그리고 새롭고 복잡한 형태의 사회생활이 실제적인 중간 계급의 부상과 함께 인간성의 범위를 넓혔고 개인의 상호 관계와 성적 관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1900 년 막스 플랑크가 흑체 복사의 비밀을 점친 바로 그 해에 지크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꿈의 해석』을 출간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자아와 자아의 전환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단 한 사람의 과학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는 당대에 적지 않은 반대론을 야기했다. 과학사가인 버나드 코언(I. Bernard Cohen)끊임없는 극도의 적대 또한 프로이트 혁명이 끼친 심대한 영향의 목록에 넣을 수 있다"고 썼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1856 5 6일 동()모라비아의 프라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프라이부르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땅이었는데, 현재는 체코 공화국의 일부로 프르지보르로 불린다. 아버지 야코프 프로이트는 크게 성공하지 못한 양모 상인으로 학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고, 20년 연하의 세번째 부인인 아말리에 나탄손이 어머니였다. 지크문트는 여덟 형제 중의 맏이였는데,그가 세 살 때 가족 모두 빈으로 이사했다. 그는 집에서 얼마 동안 배우다가 김나지움에 들어갔다. 김나지움에서는 비범한 학생이었고 열일곱 살에 졸업했다. 법률을 공부할까도 생각했지만, 1873년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연 과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썼다. 크게 부유하지 않은 집안의 학생에게 그것은 곧 의학을 뜻했다. 얼마 뒤 그 해에 빈 대학에 입학해 1881년에 졸업했다. 이 시기에 벌써 첫 과학 논문을 썼다. 숫민물뱀장어를 다룬 이 논문은 1877년에 출간되었다. 여기서는 생리학에 대한 관심도 엿보인다. 1876년에서 1882년까지는 에른스트 브뤼케(Ernst Brücke)가 지도하는 연구소에서 공부한다. 거기서 연구를 계속할 수도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의학 분야의 장래가 더 밝았다. 이것이 1882년에 그가 마르타 베르나이스와 약혼한 중요한 이유였다. 두 사람은 1886년에 결혼했다.

     

     1882년부터 1885년까지 3년간 프로이트는 빈 종합병원에서 임상 경험을 쌓았다. 거기서 또한 코카인 연구를 처음 시작했다. 한때는 마약 사용을 지지했는데, 그를 위해서 한 친구가 마약이 안과 수술에 유용함을 알아내기도 했다. 1885년 프로이트는 파리에서 짧지만 중요한 6개월을 보냈다. 거기서 아주 중요한 신경 병리학자인 장 샤르코(Jean Charcot)의 영향을 받게 된다. 샤르코는 히스테리에 흥미를 느꼈는데, 히스테리는 오늘날 신경 작용에 의한 식욕 감퇴에 비유되는 정신 질환으로 증상은 매우 뚜렷하지만 신체적·유전적 원인은 명백하지 않았다. 히스테리는 대체로 여성 특유의 질병으로 여겨졌는데 샤르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프로이트가 빈으로 돌아와 남성 히스테리에 대해 강연하자 몇몇 동료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유명한 정신병 의사인 테오도어 마이너트(Theodor Meynert)는 자신의 뇌 해부학 연구소에서 프로이트를 쫓아냈다. 프로이트가 나중에 회고하기를 "학계에서 쫓겨났고 학회들에도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개인병원에서 신경 병리학자로 일하면서 주로 마사지나 전기 요법과 같이 흔한 처방을 써서 실험을 계속했다. 이 정신 분석의 초기 단계는 '신경 작용에 의한 질환을 새롭고 매우 폭넓게 설명하려는 초기의 시도들만이 아니라 좌절도 보여 준다. 프로이트는 다재다능하고 이름난 학자인 요제프 브로이어(Josef Breuer)와 함께 최면 요법을 써서 '안나O'라는 젊은 여성 히스테리 환자를 조사했다. 두 사람의 『히스테리 연구』가 1895년에 나왔다. 감정을 분출시켜 정신 내적 갈등을 완화하는 브로이어의 '소산(消散)' 기술을 통해서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의 원인이 성적 내용의 억압된 환상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통찰에서 프로이트는 신경증적 행동이 감당할 수 없는 생각에 대항하는 정신 분석적 방어와 관계가 있다는 근본적인 개념을 발전시켰다. 신경증의 뿌리에 성적 문제가 있다는 시험적인 이론들을 제시하고 성생활의 불만족 때문에 불안과 히스테리 증상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훗날 이러한 생각들을 더 발전시키고 유아기에 성과 관련되어 입은 마음의 상처가 신경증을 낫는다는 생각도 전개했다. 1895년 무렵부터 베를린의 의사인 빌헬름 플리스(Wilhelm Fliess)와 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아 가는 동안 프로이트는 자신의 감정적 갈등을 조사하고 많은 이론적 구상을 검토한다. 훗날 '자기 분석' 이라 고 이름 붙인 방법만이 아니라 신경 생리학의 기초 위에 심리학을 세우려는 중대한 '계획'이 이때 싹튼다. 자기 분석이 완전히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고 '계획'도 단념하고 말았지만, 그 시기에 프로이트는 비할 데 없이 많은 일을 이루었다. 정신 분석이란 말이 1896년에 생겨났다.

     

     1900년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을 출간했다. 이는 이전부터 해온 정신 신경증 연구의 절정이자 일반 심리학을 향한 새 출발이었다. 프로이트의 주요 테제는 꿈이란 무의식의 갈등과 관련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었고 프로이트는 그 후 40여 년간 검토를 거듭했다. 일반적으로 그는 다윈설과 신경학을 바탕으로, 만족을 추구하는 성적이고 공격적인 충동이라는 모델을 더 정교화했다. 1904년에는 심리적 동기 때문에 일어나는 실언과 실수를 다룬 『일상생활의 정신 병리』를 출간했다. 이듬해에는 『성욕에 대한 세 가지 기고』에서 감정 발달에 관해 획기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그 책에 따르면 성인의 갈등은 유아기 성욕의 이상한 개념, 이른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연결되어 있다. 신체 성장과 감정 발달, 인지 발달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인식한 것이 프로이트의 가장 중요한 일반화에 속한다.

    정신 분석학은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이론이다. 비판이 없지 않았지만 그 영향력은 순식간에 널리 퍼져 갔다. 정신 분석학은 신경 계통에 의한 정신 질환의 치료만이 아니라 말하기 같은 사소한 행위들에 담긴 의미를 드러냈으며, 관습과 의례의 전반적 의의와 세부를 설명할 수 있었고, 널리 고수되는 신념 이면에 놓인 유아기의 동기를 밝혀 냈다. 아동의 감정과 환상에서 공격적이고 성적인 내용이 존재한다는 인식이 실제로 폭넓게 응용되어 아동 양육 기술이 변화했으며 아동기를 완전히 새롭게 이해하는 길이 열렸다.

     

     정신 분석을 치료법으로 평가하기는 더 어렵다. 정신 분석에는 애당초 특정 질병에 대한 의학적 처방같이 분명하고 믿을 만한 또는 바람직한 치료의 규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와 다른 정신 분석학자들-1900년부터 이런 '운동'에 열중한 이 정신 분석학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속성 있는 개념들을 다양하게 발전시키고 '담화 치료'를 발달시킴으로써 이 이론의 조야한 특성이 제거되었다. 자유 연상은 기본 규칙으로 환자가 그 규칙에 따라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말하게 되어 있다. 반대로 분석자는 대체로 말없이 신중 하게 해석한다. 다양하게 표현되는 저항은 치료를 방해하지만 환자가 갈등을 겪으며 어렵게 진행하고, 또 자아의 갈등과 감정적 갈등을 더 세밀하고 섬세하고 더 정직하게 이해하게 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정신 분석 개념은 전이일 터이다. 프로이트는 전이 개념으로 환자가 정신 분석자에게 원칙상 좋지 않은 이유로 미숙한 애착과 노여움의 감정을 품는다고 지적했다. 정신 분석학은 여느 심리학 이론과는 달리 언어를 통해 환상의 자질구레한 세부 사항과 감정이 겪는 미묘한 경험을 타당하게 조사할 수 있다.

     

     20세기 들어 몇십 년간 프로이트의 이론은 임상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다방 면으로 발전해 갔다. 수많은 정신 분석학 학파들이 생겨났다. 오토 랑크(OttoRank) '출생기의 외상'과 같은 새로운 가설을 기초로 삼은 학파도 있고, 발전 하는 정신 분석 이론의 특정 부분을 기각하는 학파도 있었다. 1920년대 말에 임상에서는 강조의 초점을 환자의 억압된 갈등을 폭로하는 데서 환자의 정신적 방어 수단을 조사하는 쪽으로 옮겼다. 프로이트는 무의식과 의식의 '지형학대신에 기능상 제한적이고 다소 뚜렷한 정신의 세 부분을 도입했다. 프로이트의 구조적 이론에 따르면, 유년기부터 분화되지 않은 이드(id)가 의식적 성격이 자리 잡는 자아(ego)와 처벌하는 초자아(superego)로 진화한다(프로이트의 용어를 영어로 옮기면 기술적으로 들려서 본래 의도와는 맞지 않는다. 물리학자들 이 일상어를 과학 용어로 써서 작업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때부터 정신 분석학의 과제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가혹한 초자아를 누그러뜨리는 것이 되었다.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정신 분석학은 금지당했다.물리학자들의 처지도 다르지 않아서 중요 인물들이 줄지어 미국으로 이민했다.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한 연후에야 나이 들어 암을 앓던 프로이트는 조국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는데 아주 어렵게 빠져나왔다.그는 한여름에 영국에 정착했다가 이듬해인 1939 9 23일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프로이트의 인간성에 관해 쓰고 또 공상적으로 다룬 글들이 너무 많아서 간단하게 기술한다는 것은 불충분할 수밖에 없다. 의기소침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프로이트는 본래 차분한 성격에 인정 많은 사람이었다. 인간 관계, 특히 남자들과의 관계는 격하고 다투는 일도 있었는데, 이는 그 자신의 해결되지 않은 전능한 감정들 때문이기도 했다. 뛰어난 연설가요 달변가였던 그는 농담을 즐겼고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마르타 베르나이스와 평범한 중간 계층의 생활을 했고 슬하에 다섯 자녀를 두었는데, 딸 안나는 유명한 정신 분석학자가 되었다. 종교면 에서는 호전적인 무신론자였다. 딸들과 손자들에게 했던 만큼 감정적으로 관대하지는 않았지만 아들들에게도 분명 좋은 아버지였다.

     

     프로이트의 유산은 찰스 다윈이 남긴 유산처럼 복합적이며, 프로이트의 사상을 두고 증오 섞인 숱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과학적 증거가 정신 분석학의 여러 가설들에 부합할 수도 있고 어긋날 수도 있지만, 그 가설들이 아직은 뇌 과학의 진보나 측정 가능한 일상생활의 개선을 반영하여 정교화되지 않은 상태이다. 정신 분석학자들 자신도 의사나 이론가에 의해 오래도록 의혹의 대상으로 비난받아 왔다. 정신 분석학자들은 오랫동안 현대 과학과 일치하는 합의된 기본 교의를 발전시키지 못해 왔다. 설상가상으로 정신 분석학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 가운데 이제는 과학의 플로지스톤(가상의 불의 요소)과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된 '본능 이론'에 계속 의지하는 사람도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정신 분석학의 전반적 지위가 의학적인 질병 모델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1960 년대에 머리 겔만이라는 이론 물리학자가 정신 분석학에 견고한 과학적 기초를 마련하려 했지만, 정신 분석학계의 교조주의와 혼란 때문에 좌절되고 말았다.

     

     프로이트 자신을 평가할 때 문제는 그 직업 안팎에서 생겨난다. 미국에서는 모든 세대의 대학생들이 정신 분석학이 비과학적이라고 배운다. 그들을 가르친 이들은 행동주의자들인데, 지금은 그들의 프로젝트도 대체로 신빙성을 잃었다. 동시에 언제나 끊이지 않고 제기되는 문제 하나는 동료들이 프로이트에게 바친 엄청난 경외였다. 1926년부터 숭배화가 뚜렷해졌는데 아이슬러(K. R.Eissler)는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불가해한 얼굴, 두 눈에선 명민하고 지혜로우며 분별력 있는 기운이 감돌고, 이 세상에 일어날지도 모를 비극에도 물러서지 않는 얼굴, 단 한 번도 두려움을 알아본 적이 없는 얼굴, 슬픔을 드러내긴 하지만 절망과는 거리가 먼 얼굴, 괴테(J. W. von Goethe)가 그렇게나 세상에 보여 주고 싶어한 올림포스 신들의 표정이 살짝 내비치는 듯한 억제된 얼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두고 이와 같은 말들이 널리 퍼진 적은 있지만 과학에서 이런 종류의 신성화는 유례가 없다. 하지만 이는 프로이트가 그런 터무니없는 감정의 뿌리를 들춰내고자 노력한 사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태도이다.

     

     20세기 말 허설을 제거하고 프로이트의 실체를 드러내는 일이 첨예한 문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영향력은 지나치게 열성인 모방자들이나 가장 가혹한 비판가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던 것이다. 오늘날 과학적인 대담한 기도를 더 낮추어 보는 과학사가들과 과학 철학자들은 한 세대 전보다는 정신 분석학을 배제하는 일이 잘 없다. 프로이트가 과학자가 아니라고 얘기하는 사람은언제나 있을 것이다. 프랜시스 크릭은 프로이트를 그저 '글 잘 쓰는' 사람이겠거니 생각했고, 뛰어난 면역학자인 피터 메더워(Peter Medawar)는 정신 분석학을 "지적 확신에 찬 20세기의 가장 불가사의한 속임수"라고 한 바 있다.

    그러나 로버트 홀트(Robert Holt)가 지적하듯이 "어느 병리학자가 루돌프 피르호의 글에서 현대의 기준에서 볼 때 오류인 언명을 발견한다거나, 또는 한 생리학자가 클로드 베르나르를 중상한다고 해서 결코 속임수가 될 수는 없다." 프로이트의 연구에서 감정을 자극하는 내용이 주된 약점이 되어 왔다.

     

     프로이트 이론이 아무 결실도 거두지 못했다면, 그의 영향력은 당연히 그가 죽은지 반세기 안에 줄어들거나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정신 분석학의 개념들은 꾸준히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페어베언(W. R. D. Fairbairn)처럼 프로이트의 이론이 과학적으로 다뤄질 수 있음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이론가들의 객관적 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 특히 마르가레트 말러(Margaret Mahler)와 르네 스피츠(René Spitz)의 발달 이론의 의의는 부정하기 어렵다. 피터 게이(Peter Gay)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오늘날 우리 모두가 프로이트에 관해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썼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종의 진화와 인간의 유래를 계속해서 부인할 수 있듯이 정신 분석학의 기본 명제들을 부정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고의적인 무시는 과학과는 상관이 없다. 물리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유진 위그너(Eugene Wigner)는 이렇게 썼다. “지그문트지크문트 프로이트는 틀림없는 천재이다. 혼자서 그 는 새로운 과학을 이룩했다. 지금껏 그런 일을 해낸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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