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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찰스 다윈과 진화
    THE SCIENTISTS 2024. 3. 19. 10:39

     과학과 산업이 낳은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관계는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등장으로 극적이고 세속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다윈은 1859년에 『종의 기원』을, 12년 뒤에는 『인간의 유래』를 출간했다. 진화와 자연선택에 관한 다윈의 이론은 종이 불변하며 자연의 질서에서 인간이 독특한 지위를 갖는다는 독단과 싸우면서 서구 문화에 유례없는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 다윈의 이론이 처음부터 논쟁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그 완전한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는 20세 기에 와서 진화론이 자연 과학의 엄청난 진보를 가능하게 했을 때에야 비로소 감지되었다. 유전학과 미생물학은 더욱 발달한 진화론과 함께 찰스 다윈이 남긴 20세기의 유산이다. 최근에 그의 전기를 쓴 에이드리언 데스먼드(Adrian Desmond)와 제임스 무어(James Moore)는 이렇게 썼다. "다윈은 말할 것도 없이 역사상 가장 많이 알려진 과학자이다. 어느 근대 사상가, 프로이트나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도 그보다 유명하지는 않다. 슈롭셔의 소지주 가문에서 난 이 상냥한 구세계의 박물학자가 우리가 이 행성 위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을 변혁했다."

     

     찰스 로버트 다윈은 1809 2 12일 의사인 로버트 워링 다윈과 수재나 웨지우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2 3녀 중 막내 아들이었다.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1731~1802)은 이름난 의사이자 시인이며 철학자에 발명가였고, 외할아버지는 유명한 도자기 제조업자인 조지아 웨지우드이다. 다윈이 여덟 살 되던 해 어머니가 위장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필시 암이었을 것이다. 뒷날 다윈은 누나들이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했고,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다윈은 새뮤얼 버틀러가 운영하는 이름난 사립학교인 슈루즈베리에 보내졌는데, 고전을 몹시 강조하는 그 학교의 교과 과정에 흥미를 못 느꼈다. 그는 언어를 배우는데 더뎠다. 그리고 교실 밖에서 자연사와 동식물을 채집하는데 더 열중하게 된다. 다윈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수집하려는 열정은 사람을 체계적인 박물학자나 미술품 애호가, 아니면 수전노로 이끈다. 내게는 그런 열정이 무척 컸다. 형제들 중 누구도 이런 취향을 가진 사람이 없었지만, 그건 분명 타고난 것이다."

     

     다윈의 기억 속에서 슈루즈베리의 일류 의사인 아버지는 존경스러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를 자애로운 독재자이지만 조금 거만한 인물로 보았다. 아버지처럼 찰스도 애초에는 의학을 공부할 생각으로 1825년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했다. 이듬해 플리니언 자연사 학회에 가입하여 저명한 의사 이자 동물학자인 로버트 그랜트(Robert Grant)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런데 다윈은 의학 공부가 썩 내키지 않았다. 특히 해부는 정나미가 떨어졌다. 나중에는 해부를 전혀 배우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어쨌든 인간이 당하는 고통에 아주 민감해서 수술을 참지 못했다. 당시에는 마취도 없이 수술을 했다. 다윈이 의학을 선택한 것에 불만을 느꼈기 때문에 과학의 역사에서 흔치 않은 중대한 결과가 생겨났다. 다윈이 의사가 되는 것을 미루자 아버지는 찰스더러 목사가 되라고 제의한다. 다윈은 1827년 순순히 에든버러를 떠나 케임브리지 대학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들어간다. 나중에 그 자신이 말했듯 그곳에서 헛되게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풍뎅이를 채집하고, 식물학자 존 스티븐 헨슬로(John Steven Henslow)와 함께 연구했다. 1831년 졸업하고 나서 얼마 뒤 다윈은 세계를 두루 항해할 어떤 배에 박물학자로 동승해 달라는 제의를 받게 된다. 비글 호의 젊은 선장인 로버트 피츠로이는 길고도 때론 지루할 게 뻔한 여행에 알맞은 젊고 잘 훈련된 투사를 원했다. 항해의 목적은 티에라델푸에고, 칠레와 페루 해안을 조사하고 남태평양 섬들과 인도 해역을 둘러보는 일이었다. 스승 헨슬로가 그를 소개하며 "수집하고 관찰하는 일만큼은 충분히 인정받은" 인물이라고 썼다. 다윈은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항구를 떠나는 비글 호에 올랐다. 그때가 1831 12 27일이었고, 5년 뒤에야 영국으로 돌아왔다.

     

     대중적인 과학 서적에서 다윈이 비글 호를 타고 여행한 일은 특별하게 다뤄진다.때론 모험담으로 시시콜콜히 얘기되기도 한다. 그런 얘기 속에서 다윈은 "신체 건강하고 모험심 강하며 용감한 정신의 소유자이며, 창의성이 풍부하고 지략이 뛰어나 고난을 이겨 내며, 자신이 이미 아는 환경의 한계를 뛰어넘어 형언할 길 없는 추진력으로 쉬지 않고 돌진하는 인물로 그려지곤 한다. 실제로 비글 호가 몬테비데오 항구에 정박했을 때 그곳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다윈은 남미의 초원 지대를 말을 타고 가로질렀다.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이렇게 썼다. "난 완전히 가우초(남미 초원 지대에 사는 스페인 사람과 인디언의 혼혈)였어요. 마테를 마시고 시가를 피우죠. 그리곤 하늘을 이불 삼고 누워 새털 침대라도 되는 양 편안하게 잠든답니다." 다윈은 항해 내내 뱃멀미를 했고 꽤 심한 향수병을 앓기도 했다.

     

     자연 과학에 획기적인 지적 자극이 되었다는 맥락에서 다윈이 생생한 원자료를 손에 넣는 드문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애초에 그가 가장 관심을 쏟은 분야는 지질학이다.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은 찰스 라이엘이었다. 라이엘은 얼마 전 『지질학 원리』를 출간했는데, 다윈은 항해 중에 그 책에 빠져 있었다. 그는 또한 동식물을 채집했다. 관찰한 내용을 기록하려고 현장 기록장을 지니고 다녔다. 기록은 일지 형식으로 발전했다. 갈라파고스 제도에 사는 새와 거북에게서 발견되는 미미한 변이에 흥미를 느끼고 기록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면밀히 조사하는 소질을 키워 가고 있음을 의식했다. "항상 내가 그 첫 번째 항해 덕에 처음으로 내 정신을 진짜 훈련하고 교육했다고 느낀다." 다윈이 나중에 그렇게 썼다. "자연사의 여러 갈래들을 가까이 접하게 되었다. 관찰력도 이미 상당한 수준이었지만 더 나아졌다." 비글 호는183610 2일 영국으로 돌아왔다.

     

     1837년 항해에서 얻은 지식이 아직 생생할 때 다윈은 관찰 결과를 토대로 이론적 결론의 개요를 잡았다. 1838년 토머스 맬서스(Thomas Malthus)를 읽던 중 다윈은 생활환경에 적응함으로써 특질을 보존한다는 자연선택에 대한 힌트를 얻게 된다. 그는 그때 자기 이론을 책으로 내지 않았지만 자료는 계속해서 모았다. 산호초, 화산섬, 기타 다른 지질층을 관찰한 내용으로 세 권의 책을 펴냈다. 이는 다윈에게 든든한 직업적 명성을 안겨 주었다.

     

     1842년부터는 런던 외곽의 다운 하우스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1846부터 1854년까지 다윈은 배에 붙어서 세계에 널리 분포하게 된 페스키 갑각류인 만각류(蔓脚類)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1856년에 세 번째로 자기 이론의 윤곽을 그렸다. 그러나 이제는 친구가 된 라이엘이 간곡하게 권했는데도 출간 하지 않았다. 자신의 과학적 의견에 대해 우선권을 확보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론을 표명하려면 방대한 사실들로 뒷받침해야 한다고 믿었다.

     

     1858년 다윈은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남미를 여행한 아마추어 박물학자인 앨프레드 윌리스(Alfred Wallace)가 종의 형성에 관한 이론을 뚜렷이 표현하여 다윈에게 보내 왔다. 그 해에 린네 학회에서 다윈과 윌리스가 각각 논문을 발표했고 다윈이 먼저임이 확인되었다. 이듬해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 즉 생존 경쟁에서 유리한 종족의 존속』 (이른바 『종의 기원』)이 출간된다.

     

     『종의 기원』은 즉시 과학자들과 일반 독자,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영국 과학 진흥 협회의 한 모임에서 옥스퍼드의 주교가 내용을 알지도 못하면서 다윈의 이론을 조롱한 일이다. 다윈의 불도그'로 불리기도 하는 토머스 헉슬리(Thomas Huxley)가 주교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헉슬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진리를 곡해하는 데 머리를 쓸 줄 아는 인간보다는 원숭이 쪽과 관계가 있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

     

     쿠페니쿠스혁명이나 프로이트가 창안한 정신의 무의식 가설의 경우처럼 다윈의 이론도 워낙 강력해서 실험 증거를 앞서가는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실제로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하려 하지 않은 것도, 유전의 메커니즘은커녕 유전의 규칙조차도 확실하지 않았던 사정을 고려하면 이해할 만하다.

     

     당시에 생물학자들이 가정했듯이 형질이 섞인다면, 왜 개개 형질의 적응이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에도 희석되거나 사라지지 않는가? 이 문제로 골치를 썩은 다윈은 죽기 직전 이른바 범생설(汎生說)이라는 라마르크식 해결책을 채택했다. 유전과 자연선택이 물질적으로 설명된 것은 염색체의 발견과 멘델의 재발견, 그리고 유전학자의 연구에 의해서이다.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지 반세기가 지나서 토머스 헌트 모건이 유전 형질을 설명해 냈다.

     

     다윈은 『종의 기원』을 내고 나서도 자연선택 이론과 관련한 책 열 권을 계속 펴냈다. 그 중에는 1871년의 『인간의 유래』, 이듬해의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그리고 1880년의 『식물의 운동력』이 있다.

     

     다윈의 개인사도 종종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그의 강한 개성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다윈은 1839년에 친사촌인 에마 웨지우드와 결혼하여 자식을 열 명 낳았는데, 그 중 일곱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다. 만년의 대부분을 고질병으로 고통받았다. 무슨 병인지도 분명치 않았는데, 정신 신체증(정신적 스트레스가 생리·신체 기능에 장애를 일으키는 질환) 일수 있다. 『종의 기원을 쓸 당시에는 종교적으로 유신론자였다가 나중에 불가지론자가 된다. 1882 4 19일에 죽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아이작 뉴턴과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묻혔다.

     

     찰스 다윈은 "인간의 생각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주었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 갈릴레오, 뉴턴, 라부아지에, 아인슈타인과 함께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꼽아야 한다." 매켄지(A. E. E. McKenzie) 30여 년 전에 자신의 훌륭한 역사책 『과학의 주요한 업적』에서 그렇게 썼으며, 그 의견을 바꿀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프로이트 사상과 마찬가지로 다윈의 사상도 물리학보다 훨씬 더 심각 한 개인적인 편견과 사회적 선입견의 시험대에 올랐다. 다윈 이론의 사회적 결과들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논쟁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양상을 보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스 다윈은 "천재이다"라고 조지 게일로드 심프슨은 썼다. “그에게도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잘못이 있다. 하지만 과학적인 엄밀성과 우리의 기원, 우리 몸과 자연 및 우주의 관계에 대한 지식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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