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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 보어와 원자THE SCIENTISTS 2024. 3. 18. 11:09
양자 역학은 20세기 물리학의 필수적인 체계를 이룬다. 양자 역학은 극미세계를 이해하는 수단을 제공함으로써 트랜지스터, 실리콘 칩, 핵에너지 같은 여러 가지 주요한 신기술을 낳았다. 양자 역학을 통해 화학 결합을 훨씬 폭넓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생물학적 현상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연을 조작하는 새로운 방법들 대부분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오늘날 우주론 역시도 양자 개념에 의지하고 있으며, 일상의 생활 방식을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철학적 사상의 폭넓은 변화 이면에도 양자 이론이 자리 잡고 있다. 양자 이론을 발전시킨 인물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이가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이다.
보어의 중요성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그 자신의 연구이고 다른 하나는세기의 첫 20여 년간 이론 물리학에 끼친 포괄적인 영향이다. 그는 1913년부터 매우 유력한 원자 모형을 제안하여 결국 1920년대 말에 등장하게 되는 양자 역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양자 역학이 시사하는 바를 검토했는데, 그것이 결국 결정론과 상식적인 인과 개념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양자 세계에 관한 그의 '코펜하겐 해석'은 지금까지도 유력한 위치를 차 지하고 있다. 닐스 보어와 함께 '궁극적인' 실재를 발견하려는 주류의 시도도 끝이 났다. 보어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물리학의 과제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물리학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을 다룬다."
보어는 1885년 10월 7일 코펜하겐에서 생리학 교수인 크리스티안 보어와 엘렌 아들러 보어 슬하에서 태어났다. 보어 집안은 각별히 화목하고 매우 교양 있는 지식인 가문이었다. 보어는 이런 최상의 환경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온화하고 총명했으며, 아버지는 보어 자신이 훗날 회고하듯이 "내가 바라는 게 무언지"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보어의 가족은 신앙심과는 거리가 멀었고, 보어도 종교 사상은 해롭고 잘못된 것이라고 믿는 무신론자가 되었다. 1891년부터 가멜홀름 라틴어 학교에 다녔는데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 또래로는 몸집이 커서 곧잘 주먹질도 했지만 수줍음을 타는 소년이었다. 그 자신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과학에 흠뻑 빠져 지냈다고 회고한다. 그는 1903년 코펜하겐 대학에 들어가 물리학을 전공했고 1909년 석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있었다. 1911에 박사 학위를 땄는데, 그 해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마르그레테 노르룬트와 결혼했다.
1911년에는 원자 구조를 이해하려는 혁명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실제로 보어의 박사 논문 주제는 전자 이론에 관한 것이었다. 전자는 1년 전에 조지 프J. 톰슨이 발견한 것으로서, 모든 물질의 보편적 구성 요소로 알려졌다. 톰슨은 서로 다른 안정 상태를 갖는 원자들의 다양성을 근거로 한 원자가 갖는 전자수는 원자의 무게에 상응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원자가 작고 질량을 갖는 핵을 갖고 있다는 중대한 발견을 했다. 그로써 물리 학자들은 원자가 건포도 같은 전자들이 여기저기 박혀 있는 '건포도 푸딩' 같은 것이라는 이론을 포기하게 되었다. 대신 전자가 작은 핵 주위를 궤도를 그리며 도는 러더퍼드의 모형을 받아들였다.
영국에서 러더퍼드와 작업하던 보어는 1913년 원자 구조를 다룬 세 편의 논문을 출간했다. 그 논문들이 실제로 물리학의 진로를 바꿔 놓았다. 러더퍼드의원자 모형이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해 주었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즉 선회하는 전자는 분명 핵으로 끌려들어 가면서도 왜 끝내 핵에 흡수되지는 않는가? 요컨대 러더퍼드의 모형은 원자의 주된 특성인 안정성을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
보어가 생각하기에는 뉴턴의 고전 역학은 원자 수준에서 물질의 운동을 설명할 수 없다. 그는 양자 물리학 쪽으로 눈을 돌렸다. 세기 전환기에 막스 플랑크가 양자 물리학을 이용해 '흑체 복사' 문제를 해결하려 한 바 있고, 그 보다 몇 년 앞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양자 물리학으로 입자와 같은 빛의 운동을 설명했다. 1912년 보어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연구에 집중하여 어떻게 수소 원자가 빛을 방출하는지 실험한 끝에 이례적으로 관찰 결과에 잘 들어맞는 이론을 개발한다. 전자가 궤도를 바꿀 때에만 빛을 방출한다고 가정하면, '양자'의 방출은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옮아가는 전자의 '도약과 일치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보어의 결과를 보고는 그 특유의 의미심장한 확신을 갖고 답했다. "대단한 업적이다."
알다시피 러더퍼드-보어의 원자 모형은 근본적인 진보였다. 이 모형은 곧장 알려진 모든 원소의 원자 구조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이용되었다. 1913년 보어가 이룩한 또 하나의 성과는 X선 스펙트럼을 전자의 양자 도약과 일치시킨 것이다. 다음해에는 보어의 뒤를 이어 영국의 물리학자 해리 모즐리(Harry Moseley)가 주기율표의 정확한 배열을 새로 알아냈다. 모즐리는 화학 원소들을 X선 스펙트럼으로 분석한 결과를 산출하고 그에 따라 각 원소에 원자번호를 배정했다. 그 뒤 몇 년 동안 보어는 여러 기술적 성과를 얻었다. 에이브러햄 페이스(Abraham Pais)는 이렇게 썼다. "회고해 보건대 ...... 모든 게 믿기 힘들고 놀라웠다. 원자 궤도가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들의 운동과 유사하고 스핀은 선회하는 행성들의 회전과 같다는 식의 유비에서 모든 게 나왔는데, 실은 그 유비는 잘못된 것이다." 보어는 192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실제로 보어의 원자 모형에 심각한 결합이 드러났다. '제1차 양자 혁명' 이라 고도 하는 그 모형은 더 복잡한 원자의 운동과 관련된 몇몇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다. 보어의 이론이 1913년에서 1925년까지 여러 갈래로 발전해 나갔지만 동시에 심각한 문제들이 쌓여 갔다. 결국 이른바 제2차 양자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1920년대에 보어는 자신이 제안한 원자 구조의 결함들 때문에 생겨난 물리학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 핵심 인물로 기여했다. 1916년 코펜하겐 대학으로 돌아와 이론 물리학 교수가 되었고 5년 뒤에는 이론 물리학 연구소를 여는 데 참여한다. 이렇게 해서 코펜하겐은 보어가 중심이 되어 물리학자들을 끌어들이는 요지가 되었다. 제2차 양자 혁명으로 순수하게 수학적인 원자 모형이 탄생했다. 사실상 인간이 원자 구성 입자 수준의 사건을 지각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었다. 이는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역학과 유명한 불확정성 원리 등에서 잘 나타난다. 불확정성 원리는 물질계에 관한 직접적인 지식에 한계를 설정한다.
1920년대 말 보어는 두 가지 원리를 전개함으로써 양자 혁명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기여했다. 1927년에 '양자 이론의 철학적 기초'라는 제목의 잘 알려진 강의에서 그는 최초로 상보성 개념을 다루었다. 상보성 원리란 원자 구성 입자의 세계를 파동 또는 입자라는 전혀 다른 배타적인 모델로 측정할 수 있지만 원자 구성 입자의 현상들을 완전히 기술해 내는 데에는 그 두 모델 모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견해이다. 상보성 원리의 철학적 함축에 흥미를 느낀 보어는 실제로 그 원리가 자유 의지나 기본 생활 과정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생각이 낳은 더 중요한 성과는 양자 이론이 기본적으로 완전하게 자연을 기술한 것으로서 장래의 발견들로도 변경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인정한 것이리라. 양자론이 측정해 낸 것 너머에 있는 '더 깊은 실재란 없다는 뜻이다.여러 방면에서 비판이 제기되곤 했지만 이 견해는 다양한 사고 실험, '신 의 마음', 여러 가지 우주론에도 불구하고 '코펜하겐 정신'의 기본 원리로 자리를 지켰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막스 플랑크나 다른 많은 물리학자들이 결코 이 원리를 전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기본은 바뀌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30년대에는 새로이 영역을 넓혀 가고 있는 핵물리학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1934년 물방울에 비유한 원자핵 모형을 내놓았다. 1936년에는 원자핵 이론의 개요를 제시했는데, 이것이 10여 년간 물리학자들에게 일반적인 지침이 되었다. 보어의 이론에 따르면 중성자와 양성자는 강력(强力)에 의해 단단히 묶여 있다. 이와 같이 결합되어 있는 핵을 교란시키면 에너지가 방출되는 것은 틀림없지만, 이때 원자 분열의 효과는 전혀 명확하지가 않았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처음에는 덴마크에 머물렀는데, 1940년 나치가 덴마크를 침략한다. 보어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동료들이 박해를 피하도록 할 수 있었고 나치의 전쟁 대의에 협력하지 않았다. 하지만 1943년 그가 곧 투옥될 것이라는 소문이 거의 확실해지자, 그와 가족은 스웨덴으로 탈출했고 뒤에 영 국으로, 그 다음에는 미국으로 옮겼다. 곧 맨해튼 계획(최초의 원자폭탄을 만든 미국 정부의 연구 계획)에 참가해서 닉 아저씨 란 암호명으로 활동한다. 보어 의 비중은 실제적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컸다. 그는 원자폭탄 투하에 반대했고, 전쟁중에 루스벨트와 처칠을 만나, 소련과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핵무기 경쟁을 미리 막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거절했다. 보어는 전쟁이 끝난 다음 해 귀국하여 세상을 뜰 때까지 활동을 계속했다.
1955년 코펜하겐 대학에서 은퇴한 후로도 보어는 끝까지 원자 무기의 생산에 반대한 투철하고 헌신적인 과학자였다. 그는 1950년에 미국에 보내는 유명한 공개서한을 썼고 그 일로 여러 가지 영예를 얻었으며, 1957년에는 '평화를 위한 원자' 상을 받았다. 또한 물리학계의 국제적 협력을 증진하는 데 적극적이었으며 제네바에 유럽 공동 원자핵 연구소(CERN)를 설립하는 데에도 이바지했다. 1962년 11월 17일 양자 이론의 역사에 관한 인터뷰를 했는데, 그것이 마지막 인터뷰였다. 이튿날 늘상 하듯 점심을 먹은 뒤 낮잠이 들었는데 심장 마비가 와서 숨을 거두었다. 시신은 코펜하겐의 가족 묘지에 묻혔다.
보어는 물리학을 연구하는 데서 협력을 크게 중시했다. 이 점에서는 아인슈타인과 좀 달랐다. 그래서 동료들로부터 극진한 찬사를 받곤 했다. 가족과 벗들에게서 추앙받았다. 빅토어 바이스코프(Victor Weisskopf)는 보어가 '코펜하겐 양식'을 탄생시켰다고 썼다. "우리가 아는 그는 동료들 가운데서도 단연 두 각을 나타내며, 젊은이들 속에서 그들과 똑같이 활동하고 말하며, 생기가 넘치고 낙관적이고 익살스러우며 열정적이고, 공격 정신으로 자연의 가장 깊숙한 수수께끼를 파고들며, 인습의 굴레에서 벗어난 정신과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넘쳐흐르는 정신"의 소유자였다. 마르그레테와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고 슬하에 여섯 자녀를 두었다. 그 중 아게 보어(Age Bohr)는 이론 물리학자가 되어 노벨상을 받게 된다.
닐스 보어 혼자서 물질계를 이해하는 웅대한 새 이론을 발전시킨 것은 아니지만 그는 과학의 역사에서 특이하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리처드 로즈 (Richard Rhodes)는 간단히 이렇게 썼다. “20세기 물리학에 기여한 보어의 업적 은 마땅히 아인슈타인 바로 다음으로 꼽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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