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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작 뉴턴과 과학 혁명
    THE SCIENTISTS 2024. 3. 16. 10:47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서구 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 물이다. 그는 생전에도 위대한 지적 영웅으로 대접받았고 오늘날까지도 학계에서 찬사가 끊이지 않아 300년이 넘도록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뉴턴이 태어났을 때 사람들은 물질계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는 그의 업적 덕분에 물질계가 수학적인 정확성을 갖춘 법칙들에 지배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뉴턴이 과학 혁명을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에는 과학 혁명이 이미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가 한 일은 근대 물리학에 형태를 부여하고 기본적인 지적 수단을 마련해 준 것이다. 운동의 세 가지 기본 법칙과 중력의 법칙이 뉴턴의 공이다. 그 법칙들에 따라 지상에서도 하늘에서와 같이 모든 물리 현상이 일어난다. 따라서 물리 현상은 예측할 수도 있고 질서 정연하며 원칙적으로 이치를 따르며 기술로써 조작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20세기에 와서 과학자들이 원자의 본성인 가장 작은 양을 다루면서 비로소 뉴턴 법칙의 타당성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아이작 뉴턴은 1642 12 25일 영국 링컨셔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소지주인 아버지는 그가 나기도 전에 죽었고, 어머니는 그를 세 살이 될 때까지 할머니 손에 맡기고는 목사인 바나바 스미스와 재혼해 살았다. 뉴턴은 이 의붓아버지를 몹시 싫어했다. 어린 시절을 이렇게 보냈으니, 커서 편집증에다 광적인 분노를 드러내곤 한 것도 이상스러울 게 없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분노를 잘 억눌러 참았다는 것이다. 뉴턴은 성장기에 자기의 죄악을 쓴 목록에 "내 부모인 스미스 부부에게 집과 함께 불태워 없애 버린다고 위협한 것"을 포함시켰다. 나중에 미적분학으로 발전한 최초의 중요한 수식을 기록한 데가 죽은 의붓아버지가 남긴 비망록의 여백이었다고 한다.

     

     어린 뉴턴은 호기심과 기계를 다루는 능력이 남달라서 농부가 될 사람은 아니었다. 1661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대학의 교과 과정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철학이었다. 뉴턴은 2년 만에 『니코 마코스 윤리학』에 완전히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때부터 자기가 정한 대로 독서를 해 나갔고,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과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등 초창기 과학자의 저작에 주석을 달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수학과 천체 현상에 대한 정열이 싹텄다. 그는 공책에 이렇게 썼다. "플라톤(Platon)과 아리스 토텔레스는 내 친구이다. 하지만 가장 친한 친구는 진리이다."

    1664년에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장학생으로 뽑혔다. 그리하여 이듬해에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나면 자신의 연구에 몰두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흑사병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1665년 대학이 문을 닫자 뉴턴은 집으로 돌아가 홀몸이 된 어머니 곁에서 지냈다. 거기서 생활한 2년간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처럼 발명과 수학과 철학에 미쳐 있던 적은 내 생애에 다시없었다." 실제로 이 시기에 뉴턴은 데카르트의 기하학에서 배운 바를 응용해 초보적인 미적분학을 개발했다. 수학의 한 갈래인 미적분학은 변화율을 측정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 뉴턴의 '미분법'은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을 침식하면서, 새로이 등장한 문제를 푸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이 초창기에 뉴턴은 부분적인 형태로나마 보편적 중력의 법칙을 구상했고, 역학의 기본 법칙을 정식화했으며, 프리즘을 써서 빛의 속성을 조사했다. 그는 심혈을 기울여 거의 강제에 못 이겨 논문을 썼지만, 자신의 발견을 여러 해 동안 출간하지 않았다. 이 근대 과학의 아버지는 자신의 데이터를 손 보고 또 손보았다. 완전히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감정상의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오래도록 입을 열지 않았다.

     

     1667년 런던으로 돌아온 뉴턴은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에 선출되었다. 1669년에는 그의 재능을 처음 알아본 스승 아이작 배로 (Isaac Barrow)의 뒤를 이어 루카스좌() 수학 교수가 된다. 또 반사 망원경을 최초로 발명했고, 그 일로 좋은 평판을 얻어 왕립 협회 회원으로 뽑혔다. 그가 왕립 협회에 제출한 빛과 색깔에 관한 새로운 이론이 유명한 로버트 훅 (Robert Hooke)의 공격을 받았다. 훅의 공격으로 상처를 입은 뉴턴은 물러나 학계와 연락을 끊은 채 연구를 계속했다.

     

     1684년에는 뛰어난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가 뉴턴을 찾아와, 두 사람은 당시 현안이 되고 있던 행성 운동에 관해 의견을 나 누었다. 혹은 역제곱 법칙(힘의 크기가 거리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으로 행 성 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해답은 행성이 타원 궤도로 운동하는 데 있었다. 뉴턴은 실제로 미적분학을 써서 몇 년 전에 이미 해답을 알아냈다. 그제야 그는 이 문제로 돌아와 1684년 『운동에 관하여』를 출간한다. 몇 년 뒤에는 더 완성된 작품을 펴내는데, 그것이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라고도 한다)이다. 이 책에서 그는 방대한 관 측 자료를 기초로 세 가지 운동 법칙과 보편적 중력의 법칙을 정식화했다.

     

    1. 운동하고 있는 물체는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계속 같은 속력으로 운동한다. 정지해 있는 물체는 힘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계속 정지해 있다. 이것이 관성의 법칙이다.

     

    2. 물체의 가속도는 물체에 주어진 힘에 정비례하고, 그 물체의 질량에 반비례한다. 힘은 질량에 가속도를 곱한 값이라는 방정식으로도 표현된다. F=ma.

     

    3. 모든 작용에는 크기가 같고 방향은 반대인 반작용이 따른다.

     

     뉴턴의 중력 법칙은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의 크기는 두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둘 사이의 거리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1687년 에드먼드 핼리에 의해 출간된 『프린키피아』는 과학자로서 뉴턴의 생 애의 정점이자 과학 혁명의 절정을 뜻하는 위대한 승리였다.

     

     『프린키피아』로 엄청난 명성을 얻고 새로운 과학의 살아 있는 상징이 되었지만 그 뒤 뉴턴의 인생은 모순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청교도 혁명이 끝난 뒤 1689년부터 의회에서 짧고 평범한 의원 시절을 보낸다. 1696년에는 왕립 조폐 국의 이사에 임명되고 3년 뒤에는 국장으로 승진한다. 국장은 화폐 위조범을 기소할 권한이 있었다. 그는 정력적으로 그 일을 해냈다. 1703년 왕립 협회 회 장으로 선출되어 1727 3 31일 죽을 때까지 회장직을 맡았다. 1704년 그를 괴롭히던 적수 로버트 훅이 죽자 『광학』을 출간한다. 뉴턴의 권위가 워낙 대단 했기에 빛에 관한 이론은 결함이 없지 않았는데도 다음 세기 동안 풍미했다. 1705년 과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앤 여왕에게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가 죽었을 때 엄청난 양의 미간행 수고가 발견되었다. 수고는 연금술을 연 구한 난해하고 불가사의한 말들로 가득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연금술에 골몰 했다. 자기가 바라는 대로 천(賤) 금속을철학자의 수은'으로 바꾸기 위해 실험을 거듭하면서 깊이 파고들었다. 연금술 연구에도 물리학 연구만큼이나 열 심이었지만, 물리학 연구에서와 같은 신중하고 합리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문제가 많은 학자들을 괴롭혔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뉴턴이 쓴 연금술 관련 논문들을 사서 읽어 보고는, 결국 뉴턴이 과 학자가 아니라 '마법사'라는 결론을 내렸다. 경제학자의 흥미로운 판결이다. 뉴턴은 연금술의 화려한 목표에 끌린 만큼이나 그 종교적 요소에 매력을 느낀 것 같다. 뉴턴의 전기를 쓴 게일 크리스티안슨(Gale Christianson)은 뉴턴이 우주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추구했다고 썼다.

     

     뉴턴의 일생이 계속된 불화로 얼룩져 있어서 근대인의 눈에는 도저히 공감이 가지 않는 인물로 비칠지 모른다. 뉴턴은 라이프니츠(G. W. Leibniz)와 훅 같은 동시대의 인물들과 까닭 없이 증오에 사로잡혀 논쟁하고 격분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을 추종한 청년 니콜라 파쇼 드 뒤예와 지극히 돈독한 관계를 맺어, 그와 헤어진 뒤 정신적 파탄을 겪었던 것 같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특별 연구 원이라는 지위 때문이었지만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어른이 된 이후로는 줄곧 남자들 사회에서만 생활했다. 그는 거의 웃지도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한 친구가 "그리스 수학자인 유클리드를 공부하는 게 무슨 쓸모가 있는지 아무래도 모르겠다"고 말하자, 뉴턴이 폭소를 터뜨렸다는 것이다. 에라스무스 다윈(Erasmus Darwin)은 이렇게 썼다. "뉴턴은 원인과 결과를 좇아 자연의 세계를 탐험했다. 그리곤 매혹당했으며, 자연의 숨은 법칙을 모두 밝혀 냈다.”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는 더 멋들어지게 2행 대구를 지어 죽은 뉴턴에게 바쳤다. 그 시는 울스토프 장원의 뉴턴이 태어난 방에 아로새겨져 있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에 싸여 있었네/신께서 말하길, 뉴턴이 있으라! 하시자 모든 것이 광명이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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