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이 파스퇴르와 질병의 세균 이론THE SCIENTISTS 2024. 3. 19. 11:30
악마나 독기(늪지 따위에서 발생해 말라리아를 일으킨다고 여겨진 것)가 아닌 미생물이 병을 일으킨다는 이론이 나온 것은 불과 100여 년 전의 일이다. 르네상스기에 매독을 명명한 이탈리아 의사 프라카스토로(G. Fracastoro)가 제안한 이래 전염 이론은 200년 넘게 지지자들이 있어 왔지만 결정적으로 확립될 수는 없었다.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배경에는 여러 의사들이 각기 관찰한 결과와 영국의 외과 의사인 조지프 리스터(Joseph Lister) 같은 이들의 체계적인 연구가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엄청난 성공을 거 두게 되는 세균학은 주로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라는 천재의 공이다.
지크문트 프로이트처럼 흔히 과도하게 추앙받곤 한 파스퇴르가 최근의 연구로 제자리를 찾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미 그 생전에 평가된 대로 그가 역사상 가장 걸출한 과학자의 반열에 속한다는 결론을 부인하기란 어렵다. 화학을 전공한 파스퇴르는 초기에는 결정학(結晶學)을 연구했는데, 곧 식초, 포도주, 맥주 등의 발효라는 실제적인 문제로 방향을 틀었다. 그의 이력에서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국면에 인간과 동물의 전염병의 원인을 규명하고 수많은 질병과 맞서 싸우는 방도를 연구해 많은 성과를 올리는 가운데 탄저병과 광견병을 예방하는 백신을 개발했다. 파스퇴르는 부단한 실험으로부터 견고한 이론적 결론을 도출하는 데 비범한 재능을 발휘하여 의학의 전반적인 혁신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원칙적으로 수백만의 생명을 구하고 세계 전역의 일상생활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파스퇴르가 당대에 전설적인 명성을 얻었다는 사실이나, 또 오늘날 위대한 과학자들을 더욱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그의 업적이 훨씬 더 치밀한 조사를 받게 된 사실, 어느 것이나 당연하다.
루이 파스퇴르는 1822년 12월 27일 프랑스 동부의 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제프 파스퇴르는 나폴레옹 군대의 상사 출신인 제혁업자로 아들에게 매우 적극적인 영향을 주었다. 파스퇴르는 젊은 시절 전도 유망한 화가 였지만 열아홉 살에 예술가가 되겠다는 야망을 단념하고 과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브장송 콜레주를 졸업하고 나서 그와 가족은 그가 파리의 고등 사범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고등 사범학교는 그때도 지금처럼 교양 과목과 자연 과학을 가르칠 대학 교수를 길러 냈다. 1842년에 입학 시험을 치렀는데 화학은 '보통'이었고 전체로는 아주 낮은 등수여서 입학 허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더 공부해서 다시 시험을 치러 수석에 가까운 점수로 입학하게 된다. 이 일은 파스퇴르의 근면과 완전주의, 자기 중심벽과 기행(奇行)을 상징한다. 그는 물리학과 화학을 공부했고 1846년에 수료하여 교수 자격을 얻었다. 이듬해 논문 두 편을 발표하는데 각각 물리학과 화학에 관한 것이었다.
파스퇴르의 첫 번째 발견은 1848년 당시에 꽤 활발했던 결정학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거기서 그는 집요함과 관찰력, 일반론을 정식화하는 능력을 보여 준다. 화학자들은 타르타르산염에서 나온 특정 결정들이 화학적으로는 같으면서도 광학적 성질은 다르다는데 주목했다. 즉 빛을 굴절시키는 결정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것에는 그런 성질이 없었다. 베르셀리우스(J. J. Berzelius)가 그런 부류의 화합물을 기술하기 위해 이성질체라는 용어를 썼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파스퇴르는 핸드렌즈 핀셋을 써서 오랜 시간 비상하게 정확한 관찰을 한 결과, 똑같은 결정의 두 가지 형(型)이 실제로는 하나가 다른 하나의 거울상임을 입증했다.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파스퇴르는 그 비밀을 풀고서 "모든 것이 밝혀졌다!"고 외쳤다고 한다. 그 말은 흔히 인용되는 말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타르타르산의 구조를 밝혀 냈을 뿐만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물질인 여러 비대칭 분자들을 발견했음을 알았다. 분자 구조의 배열이 어떻게 화합물의 성질에 영향을 주는가를 다루는 이런 연구는 입체 화학으로 알려지게 된다.
1854년 파스퇴르는 릴 대학의 화학 교수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발효 연구로 관심을 돌린다. 한 지방 산업가가 왜 자신이 만든 비트(샐러드용 사탕무)즙의 일부가 에틸알코올로 바뀌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요청해 와서 파스퇴르는 그 문제를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연구 대상을 넓혀 젖산 발효와 알코올 발효를 포함시켰다. 당(糖)에서 알코올을 생산하는데 관여한다고 알려진 발효를 유스투스 리비히나 당대의 유명한 화학자들은 화학적 과정으로 보았다.
그러나 파스퇴르는 발효가 생물학적 과정이며 효모의 증식에 관여한다는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1857년에 이른바 젖산 발효에 관한 보고라는 짧은 논문을 출간한다. 그 논문은 미생물학을 탄생시킨 주춧돌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파스퇴르의 이론이 전적으로 옳지는 않았지만 아주 많은 성과를 낳아서. 그는 "느리고 점진적으로 분해되는...... 특정 화합물로부터 산소를 얻을 만큼 호흡 작용이 활발한 생물의 한 범주"가 있다고 제안하기에 이른다. 그는 혐기성 생물(균류처럼 산소가 없어도 자라는 생물)을 발견하여 사람들이 수백 년간 맥주와 포도주를 만드는데 이용해 온 방법에 과학적 기초를 마련했다. 오늘날 효모는 식품과 알코올 생산만이 아니라 비타민, 항생 물질, 호르몬 등의 제조 에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
파스퇴르는 1857년 파리로 돌아와서 고등 사범학교의 과학 연구부 책임자가 되었다. 발효 연구로 파스퇴르에게는 자연 발생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고대인 들은 특정 생명체가 생명이 없는 것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가령 오물에서 벌레나 파리가 나온다는 식의 제법 그럴듯한 관념이었다. 이것은 유기 화학에 의해 서도 부단히 잠식되는 중이었는데, 파스퇴르가 인상적인 여러 가지 기발한 실험을 했다. 그는 대기 중의 공기에는 반드시 미생물이 있으며 그 생명체는 산소에 노출된 설탕물처럼 사실상 언제든 입증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는 백조 목처럼 구부러진 플라스크를 가열하여 끓이면 공기가 들어올 때까지는 아무 생물도 나타나지 않음을 확인했다. 한번은 쥐라 산맥의 몽푸페에 올라가서 플라스크들을 열어 놓아 그런 지역이 상대적으로 덜 오염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르네 뒤보(René Dubos)는 이렇게 썼다. "파스퇴르가 연구를 마치자 적어도 보통의 조건에서 자연 발생이 일어난 적이 있다고 믿을 아무런 이유도 없어졌다."
1863년 무렵부터 10여 년에 걸쳐 루이 파스퇴르는 프랑스 산업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전 세계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나폴레옹 3세가 통치하던 1863 년에는 포도주의 변질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포도주가 식초로 바뀌거나 씁쓸해지거나 상해 버리는 것이었다. 파스퇴르는 세균의 부패 작용이 그런 결과를 가져왔음을 입증할 수 있었다. 그는 애당초 방부제를 포도주에 넣을까도 했지만 열처리가 더 합당한 해결책임을 알았다. 실제로 열 처리는 스페인 등지에서 농민들이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1871년 프랑스가 독일에 지고 나서 파스퇴르는 비슷한 원리를 맥주에 응용했다. 이 행동은 얼마간 애국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맥주나 포도주를 50~60℃로 단시간 가열하는 파스퇴르 살균은 곧 매우 많은 식품들, 특히 유제품에 적용되었다.
1860년대에 파스퇴르가 해결해야 했던 또 다른 문제는 누에의 질병이었다. 그는 부화 과정에서 알이 병드는 것을 억제하여 프랑스의 실크 산업을 파국의 위기에서 구해 낼 수 있었다.
파스퇴르는 1873년 무렵 대단한 명사가 되었고 인생의 마지막 20년간 전염병 연구로 추종자들이 계속 늘어났다. 파스퇴르는 1880년에 닭의 콜레라를 일으키는 생물을 분리한 뒤 처음으로 백신 개발을 시도했다. 아마도 경쟁을 피하려고 그는 자신이 어떻게 백신을 만들게 되었는지를 비밀에 부쳤다. 내용은 그 저 공기 중에 노출하여 약해진 세균을 이용했다는 것뿐이었다. 파스퇴르는 약해진 세균을 동물에 주사하면 면역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를 일반 원리로 파악함으로써 그는 일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웅적인 시기를 맞는다. 제일 먼저 닭의 콜레라 연구에 성공한 파스퇴르는 탄저병을 공략하게 된다. 탄저병은 가축에 감염되어 인간에게 옮을 수도 있는 병이었다. 치밀한 조사 끝에 파스퇴르는 원인균을 확인했고, 그 균이 풀밭에 묻힌 동물의 시체에 의해 전염된다고 밝혔다. 1881년에는 그가 약화된 바이러스에서 개발해 냈다고 주장한 탄저병 백신을 극적으로 공개 실험했다. 전염성이 강한 배양균을 양 50마리에게 주사했는데 미리 예방 접종을 하지 않은 25마리는 모두 죽었고 접종한 양은 모두 살았다. 이 실험은 파스퇴르가 하겠다고 나서서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탁월한 천부적 재능으로 성공했고 이 일이 여러 매체에 널리 보도되었다. 발생기의 면역학에서 파스퇴르의 실험은 1880년대에 개발된 유명한 광견병 백신과 함께 절정에 이르렀다. 광견병은 극적인 증상과 치명적인 결과 때문에 특히 신비화되었고 사람들이 겁내는 질병이었다. 연구실에서 파스퇴르는 약화시킨 배양균을 개들에게 주사한 다음 정상균에 노출해 봄으로써 예방 접종에 성공했다. 그는 이 백신을 사람에게 시험하려고는 하지 않았는데 한 소년이 그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1885년 조제프 메스테르란 소년이 광견병에 걸린 개에 물려 그를 찾아왔다. 백신을 주사하지 않으면 죽고 말 상황이었으므로 파스퇴르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예방 접종을 했다. 어린 메스테르는 목숨을 건졌고 파스퇴르에게는 온갖 찬사가 쏟아졌다." 이 마지막 성공 덕분에 대중들이 기부한 돈으로 의학 연구소를 세웠으며, 이 연구소는 오늘날까지 그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루이 파스퇴르는 1849년에 마리 로랑과 결혼해 네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두 명만이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그는 부르주아적 체통의 전형이었고 애국자요, 권위주의자였으며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1868년에 발작이 있고 나서 남은 인생 동안 걸음걸이와 언동, 손놀림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
그는 생클루에서 1895년 9월 28일 숨을 거두었고 국민의 영웅으로 국장에 치러졌다. 그는 아내와 함께 파스퇴르 연구소의 지하 묘실에 묻혔다.
파스퇴르가 뛰어난 연구 능력과 비범한 기억력을 타고났다는 사실은 의외가 아니다. 필시 더 중요한 것은 세부를 꿰뚫는 능력에다 광범하고도 정확한 일반 화의 소질이 더해진 것이다. 그의 저술이 포괄하는 영역과 명쾌함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이러한 재능은 아이작 뉴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찰스 다윈 그리고 지크문트 프로이트에게서도 볼 수 있는 그런 능력이다. 이 인물들 중 몇몇처럼 그에게도 못마땅하고 싫은 구석이 있었다. 파스퇴르는 클로드 베르나르에게 약간의 반감을 가졌고 경건한 애국자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다윈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결점 들도 자크 니콜의 말 앞에서는 무색해진다. "우연한 관찰에서 발휘되는 그의 비범한 재능은 주제마다 훗날 연구자들이 나아갈 길을 열어 주었다. 마치 강이 넓은 토지에 물을 대면서도 제 갈 길을 잃지 않고 바다로 흘러가는 것처럼."
자신의 주제를 철두철미하게 연구한 위대한 과학자들처럼 파스퇴르도 초기 전기 작가들의 주장에 걸맞게 행동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최근 역사가이자 전기 작가인 제럴드 게이슨(Gerald L. Geison)이 한 뛰어난 저작 에서 파스퇴르가 탄저병의 백신을 불활성화가 아니라 어떤 경쟁자가 개발해 놓은 기술에 의존하여 개발했다고 주장하며 기록으로 입증했다. 비슷한 속임 수가 광견병 백신의 경우에서도 있었다고 한다. 게이슨은 "파스퇴르의 과학적 연구가 엄청나게 중요하며 많은 결실을 낳았고 그의 원리들 가운데 일부는 지금까지도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고 인정했지만, 이른바 파스퇴르 신화의 불필요한 측면들은 평가 절하하려고 했다. "그 이미지는 우리에게는 그 의미가 대부분 잊혀진 상황에서 형성되었다. 당시에는 영웅의 전기가 널리 승인된 도덕적 진실로 변하곤 했으며 과학이 곧바로 유익하고 '실용적인' 지식으로 비쳤다. 영웅을 요구하고 영웅을 찾는 시대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런 이미지를 사실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THE SCIENTIS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새로운 과학 (0) 2024.03.20 지크문트 프로이트와 무의식의 심리학 (0) 2024.03.20 찰스 다윈과 진화 (7) 2024.03.19 닐스 보어와 원자 (0) 2024.03.18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20세기 과학 (1) 2024.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