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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새로운 과학THE SCIENTISTS 2024. 3. 20. 11:51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는 초기 과학자들 가운데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의 인생과 업적은 과거 여러 세대에 걸쳐 수많은 역사가와 비평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의 업적은 실로 많다. 고전 역학을 초기 형태로 기술했고, 또 그가 망원경으로 관찰하여 밤하늘을 묘사한 내용은 천체 물리학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갈릴레오가 새로운 과학적 관점을 집약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그는 수학적 추론을 바탕으로 한 언변과 인덕으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계 모형을 과학 혁명으로 확립하는데 이바지할 수 있었다. 자신의 발견들이 철학적으로 함축하는 바를 완전히 의식했기에, 그는 카톨릭 교회의 권위와 도그마를 위협하는 논쟁적이고 극히 두드러진 인물이 되었다. 비평가 들은 갈릴레오의 과학적 탐구 정신의 본질에 관해 오랫동안 논란을 거듭해 왔지만 역사적으로 갈릴레오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2월 15일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났다. 음악가이자 상인인 빈센지오 갈릴레이와 줄라 아마나티의 아들이었다(성을 반복한 이름은 토스카나의 관례였다). 집은 부유한 편이 아니었고, 그가 어렸을때 피렌체로 이사했다. 갈릴레오는 예수회 수도원이 운영하는 학교에 들어갔지만, 열 다섯 살에 수사가 된 다음 아버지 손에 끌려 수도원을 나왔다. 1581년 의학을 공부하기로 하고 피사 대학에 들어가지만 의학 공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논쟁을 즐기는 인물로 소문이 났다. 그는 곧 수학에 흥미를 느꼈고, 1585년 학위도 받지 않은 채 피사 대학을 나와서 피렌체로 돌아가 강의를 했다. 아버 지가 죽고 난 뒤 1592년에 파도바 대학으로 옮겼다. 거기서 군인용 컴퍼스 같은 것들을 발명하면서 계속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유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마리나 가바라는 여인과 사귀어 사생아를 몇 낳아 늙은 어머니의 속을 썩였다.
초기 저작으로 가장 중요한 『운동에 관하여』는 동력학에 관한 것인데, 그가 우세한 그러나 허물어지고 있는 스콜라 과학의 원칙들을 회의하고 있었음이 엿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하고 있는 물체는 끊임없는 동인을 요구한다고 했다. 가령 공은 공기가 뒤에서 밀어서 앞으로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의 약점이었다. 갈릴레오가 초기에 관심을 둔 것이 그 점이었다. 십중팔구 탄도 기술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탄도 기술 자들 중에는 날아가는 총알이 땅으로 끌려 내려오는 것 같다는 것을 아는 이들도 있었다. 갈릴레오는 그 관찰의 중요성을 깨닫고 직접 공을 탁자에서 굴려 떨어뜨려 봄으로써 일반 법칙을 발견한다. 즉 던져진 물체는 곡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아르키메데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수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그 발견을 간단한 수학 공식으로 요약했고, 이를 1604년에 한 편지에서 처음 적었다(갈릴레오의 계산 착오는 여러 과학 철학자들로 하여금 그가 의도한 추론 방침 이 무엇인지 꽤나 고심하게 만들었다)
갈릴레오의 인생에서 새롭고 중요한 국면이 그가 망원경이 발명된 사실을 접한 1609년에 시작되었다. 그는 대상이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1,000배 더 가까이 보이는 망원경 모델을 송수 만들었다. 그리고 초점은 달에 맞추었다.
낡은 우주 과학에 의하면 하늘의 물체는 형태가 완벽했지만, 갈릴레오는 지구의 위성에 마마 자국이 있음을 발견했다. 봉우리와 골짜기, 그리고 바다로 짐작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밤하늘을 더 자세히 관찰하여 은하가 추측대로 무수한 별들로 이루어졌음을 발견했다.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에서 말하는 태고의 밤하늘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제로 1610년에 『천계 통보』가 출간되자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역사가 라베츠(J. R. Ravetz)는 그 얇은 책자를 가리켜 "필시 대중적인 과학 서적으로는 지금껏 나온 것 중 첫째가는 고전이며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교묘하게 선전하는 걸작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곳곳의 학자들이 『천계 통보』를 사 보았고, 5 년 안에 어떤 예수회 수사가 중국어 번역본까지 냈다. 아마도 가장 흥미롭고 놀라운 발견은 알려진 행성인 목성 주위를 밤마다 자리를 바꾸며 돌고 있는 듯 한 네 개의 물체였다. 갈릴레오가 보기에 틀림없는 위성이었고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축소해 놓은 모형 같았다.
『천계 통보』로 성공을 거둔 갈릴레오는 더 나아간 발견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천계 통보』의 성공은 또한 그를 가톨릭 교회와 갈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유명 인사였고, 1611년 알현했을 때 교황은 다정하게 그를 격려 했다. 곧 갈릴레오는 예전에 제자였던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2세를 강력한 후원자로 얻게 된다. 대공은 갈릴레오를 수석 수학자 겸 철학자로 임명한다. 1612년의 『유체에 관한 담화』는 유체 정력학(流體靜力學)을 탄생시켰으며, 이듬해에는 태양의 흑점을 관찰한 내용을 논의한 일련의 편지들을 책으로 펴냈다. 여기서 갈릴레오는 공공연하게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했으며 관성의 원리를 최초로 정식화한다. 하지만 이때껏 교회 인사들의 격분을 사 온 그는 1616년 로마를 방문했을 때 이미 발표된 공식 포고에 반하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을 가르치지 말라는 경고를 듣는다. 이단 판결은 모면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특별히 관대한 처분이었을 것이다. 그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1623년에는 혜성의 성질을 다룬 논쟁적인 글, 『분석가』를 출간하여 새 교황인 우르반 8세에게 헌정했다. 우르반 8세는 교황이 되기 전부터도 (마페오 바르베리니로서) 그를 후원했었다. 갈릴레오는 1616년 판결의 규제가 풀리길 바랐다. 하지만 후원자이던 코시모 2세가 죽자 갈릴레오는 전보다 더 위태로워 졌다. 그는 오랜 친구에게서 복잡한 전언을 들었는데, 그 친구는 과학에 호의를 가진 인물이 아니라 군사 전문가로 밝혀졌다.' 그렇지만 올바른 결론을 내리기만 한다면 우주 체계에 대해 논의해도 좋다는 허락이 내려지자, 갈릴레오는 『두 개의 주된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를 1632년에 출간했다. 과학의 걸작인 이 책에서 갈릴레오가 『고대와 근대 음악에 대한 대화의 저자인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심리적으로 이는 필시 갈릴레오가 자신이 벌인 일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두 개의 주된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를 1633년 3월에 출간하여 크게 성공했지만 6개월 뒤 심문관이 그를 찾아왔다. 『두 개의 주된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는 금지되었고 곧바로 갈릴레오는 또다시 로마로 소환되어 형식상 구금된다. 갈릴레오의 이름 높은 독자인 교황 우르반 8세와 심문관이 문초한 내용은 여러 해 동안 많은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주된 문제는 갈릴레오가 1616년의 경고에 불복하는가였다. 이 재판에서 갈릴레오가 비겁했다고 책망하는 이도 있었다. 실제로 그는 정치범이었고 늙고 병들었다. 정식으로 이 단자들이 경고 팡파르와 함께 화형에 처해지는 그때 갈릴레오를 고문하겠다는 협박도 있었다. 마침내 교회는 『두 개의 주된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를 금지하고 불태웠으며, 많은 군중이 보는 자리에서 창피를 주었다. 그러나 그를 순교자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는 아주 쾌적한 환경에서 감옥 생활을 했다.
갈릴레오의 의지처였던 교회의 유죄 판결도 그를 끝장내지는 못했다. 1634 년에 라이덴에서 『두 개의 새로운 과학에 관한 논의』가 출간되었고 역학의 원칙들에 관한 실험을 계속했으며, 1637년에는 달이 비틀거린다는 마지막 과학적 발견을 했다. 금서가 된 『두 개의 주된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도 곧 유럽의 신교국 전체에 알려졌다. 갈릴레오는 시인 존 밀턴과 철학자 토머스 홉스의 예방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 쓴 편지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에 대한 신념을 고백했는데, 이것은 오늘날 의도의 완전한 역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갈릴레오가 실명한 것은 분명 백내장 때문이었다. 1642년 1월 9일 일생을 마쳤다.
그가 죽은 지 350년이 지난 뒤, 크라코프의 대주교로 봉직하면서 스스로를 '코페르니쿠스파 사제'라고 즐겨 말하곤 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카톨릭 교회가 갈릴레오에게 부당한 대우를 했다고 시인했다. 1992년의 이 고백은 여론을 의식한 행위였던 것 같다. 그 말은 <뉴욕 타임스>의 예리한 표제와도 일치한다.년이 지난 후에 바티칸은 갈릴레오가 옳았다고 말한다. 지구는 돈다." 1989년 10월 우주 탐사선 갈릴레오 호가 우주선 아틀란티스 호에서 발진 했다. 1995년 갈릴레오 호는 385년 전 갈릴레오가 처음 네 개의 위성을 발견한 그 목성에 도착했다.
과학의 역사상 엄청난 과도기의 인물인 갈릴레오의 작업은 아이작 뉴턴 에 의해 정식화되었다. 그런데 갈릴레오가 끼친 영향의 본질은 지난 50여 년 동안 많은 학술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 1939년 알렉상드르 쿠아레(Alexander Koyré)는 과학에서 그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개념적이고 철학적인 영향에 있다고 쓰면서 갈릴레오가 실험을 이용한 사실을 낮게 평가했다. 이것이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영향으로 스틸먼 드레이크(Stillman Drake)는 갈릴레오의 공책과 수고를 공들여 다시 평가하기도 했다. 드레이크는 "일관된 묘사가 갈릴레오를 인정받을 만한 근대 자연 과학자로 만들었으며, 갈릴레오는 중력의 성질을 선구적으로 탐구했다. 여하튼 갈릴레오는 요하네스 케플러와 함께 과학 혁명에서 뉴턴 이전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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