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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하네스 케플러와 행성의 운동
    THE SCIENTISTS 2024. 3. 21. 17:33

     

     행성 운동의 법칙을 밝혀 내고 천체 역학을 탄생시킨 것은 요하네스 케플러 (Johannes Kepler)의 공이다. 케플러는 17세기 초에 일어난 천문학 혁명의 주역 이자 최고봉으로서 그의 중요성은 오늘에 와서 더 빛나고 있다. 태양 중심의 우주는 코페르니쿠스가 제안한 지 반세기가 지난 17세기 초에 갈릴레오의 발견과 저술로 보강되었다. 케플러는 신심이 두텁고 천문학에서 신을 찬미하고자 했으며 종교 개혁과 반() 종교 개혁이 한창이던 때를 살다 간 루터파였지만, 충실한 조화에 대한 그의 종교적인 애착은 헌신적인 관찰과 균형을 이루었다. 케플러는 별 성과가 없는 가설들을 포기하고 대신 수학적 법칙을 추구할 수 있었다. 그는 태양계를 발견하고 이렇게 썼다.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것이 진실임을 알았다. 나는 놀라우리만치 황홀하게 빛나는 아름다움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예전의 독일 뷔르템부르크 주의 작은 도시인 바일에서 1571 12 27일 태어났다. 군인인 아버지는 좀 괴짜였다. 케플러 자신은 유년기에는 병약한 소년이었고, 커서는 우울증에 시달렸다. 튀빙겐 대학에 들어가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굳게 믿던 미하엘 매스 틀린(Michael에게서 배웠다. 애초에는 신학자가 되려고 했으나 1591년 졸업한 후 그라츠 대학에서 교직을 얻었다. 그라츠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한 슈티리아 주의 도시였다. 케플러는 수학과 도덕을 가르치는 교수로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해서 학생이 거의 없었다. 신빙성이 점차 떨어지고 있는 점성술을 믿었기 때문에 시간이 나면 천궁도(天宮圖)를 만들어 별점을 치고 천문학을 공부했다.

     

     케플러는 1597년에 『우주 구조의 신비』를 출간한다. 거기서 태양 중심의 우주를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한다. 눈에 띄는 것은 케플러가 피타고라스 (Pythagoras)의 개념을 태양 중심의 우주라는 관념과 결부시킨 점이다. "모든 것은 수"라고 말했다는 고대 그리스인(피타고라스인 것으로 추측된다)이 수학에 부여하려 한 특별한 존재론적 지위를 케플러도 진지하게 고려했다. 케플러는 여섯 개의 알려진 행성의 궤도가 제각기 고대 그리스인들이 발견한 다섯 개의 기하학적 입방체를 포함하고 있음을 보이려 했다. 가령 목성의 천구 안에는 정육면체가 있다. 수성의 경우는 8면체가 들어간다. 갈릴레오가 케플러가 보낸 책을 받아 보고 우호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신중한 태도로 답한 것도 당연하다.

     

     1600년 케플러는 반 종교 개혁기에 루터파로 박해받을까 봐 그라츠에서 프라하로 피했다. 거기서 위대한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의 조수로 일하며 짧지만 중요한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은 어려운 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브라헤는 평생 동안 수집한 천체 관측 자료 (그가 애지중지 간수해 온)가 자신의 우주 체계를 뒷받침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듬해 브라헤가 죽자 케플러가 이 방대한 관측 자료를 물려받았다. 화성에 관한 놀라운 자료도 들어 있었다. 케플러는 이 자료들을 이용하여 브라헤처럼 정확성을 추구하면서 연구하여 8년 동안 그의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해낸다.

     

     케플러는 종래의 천문학과 주목할 만한 단절을 함으로써 힘 개념에 호소하게 되었고 행성의 운동을 설명하는 법칙을 제시할 수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를 포함해 그 이전까지 천문학에는 그 같은 개념이 없었고 필연적으로 행성이 오고 가는 것에 대한 예언들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화성의 궤도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도, 코페르니쿠스 체계와도 맞지 않음을 안 케플러는 마침내 두 체계의 공통분모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즉 완전한 원 궤도에 대한 고대의 철학적 확신과 아울러 행성들이 일정한 속도로 운동한다는 가정도 포기했다. 자신의 자료에 따르면 모든 행성이 태양에 접근할 때 더 빨라지며 태양에서 멀리 떨어져 움직일 때에는 더 느려진다. 시행착오 끝에 케플러는 이 운동을 지배하는 법칙을 발견한다. 동경, 즉 태양과 행성을 잇는 가상의 선이 같은 시간에 같은 면적을 스쳐 지나간다. 이것이 케플러의 제2법칙으로 알려지게 된다.

    2법칙이 코페르니쿠스 체계 테두리 안에서 발견되었지만 행성 궤도의 정확한 형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상당한 연구 끝에 케플러는 타원의 장점을 깨닫게 된다. 고대인들도 타원을 알고 있었다. 타원은 그가 예측한 호()와 아주 정확하게 맞았고 케플러의 제1법칙이 되었다. 즉 행성의 궤도는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이다.

     

     케플러의 첫 두 가지 법칙은 1609년에 출간된 『새로운 천문학』에 실렸다. 갈릴레오와 마찬가지로 케플러도 우주의 중력 법칙을 발견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근접했다. 케플러는 행성의 물체들 사이에 그 질량에 비례하는 힘이 작용함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 힘이 자력이라고 밝혔다. 『새로운 천문학』의 핵심의 의는 천문학의 목표와 방법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설정한 데 있다. 천체 기하학은 새로운 천체 물리학에 종속되며, 천체 물리학은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법칙들에 따라 작용한다.

    1619년에 케플러 자신이 걸작이라고 생각한 『우주의 조화』가 출간된다. 『우주의 조화』는 화보들과 음악적 예증 (행성마다 고유한 음역이 있다)으로 가득하다. 『우주의 조화』는 이따금씩 무아지경에 빠지는 작가를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수학의 개념들이 우주를 아는 수단이며 그러한 우주관이야말로 인류가 신과 공유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믿은 케플러의 견해가 잘 드러난다. 자주 신비론으로 빠지긴 하지만, 그 책에는 케플러의 행성 운동 제3법칙도 실려 있다. 행성이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 즉 공전 주기의 제곱은 행성의 평균 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 이로써 행성이 궤도를 도는 동안 태양과 행성의 거리를 계산할 수 있다.

     

     케플러는 앞서 본 주요 저작들에 더하여 중요한 광학 논문 두 편을 썼다. 1619년에서 1621년까지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를 출간했는데, 이 책은 즉시 카톨릭 교회의 금서 목록에 올랐다. 1627년에는 브라헤의 작업을 기초로 해서 알려진 별들의 도표를 펴냈는데, 그것이 곧 『루돌프 목록』(행성의 위치 계 산에 널리 쓰인 수표數表, 로그표, 굴절률표 등을 수록. 티코 브라혜가 만든 777개 별의 위치에다 추가로 총 1,005개 별의 목록을 실었다. 수표에는 100년이 넘는 기간 의 행성 위치가 계산되어 있다)이다. 이것은 한 세기 이후까지 사용된다.

     

     모든 기록으로 보아 반 종교 개혁기의 유럽에서 보낸 케플러의 만년은 편안하지 못했다. 브라혜의 자료를 간행하는 일 때문에 가족과 다투었고 봉급은 언제나 제때 나오지 않았다. 아내와 아들이 1611년에 죽고, 이듬해에는 후원자인 루돌프 황제마저 반란의 여파로 폐위되어 제국 천문학자 자리를 잃게 된다. 케플러는 곧 린츠로 옮겨 수학자로 일하다가, 1625년경 다시 종교 박해를 피해 울름으로 옮긴다. 1627년 프라하로 돌아온 케플러는 자간 공작의 영접을 받고 그의 점성학자가 되었다. 그 직책으로 또다시 의혹을 사 결국 새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그는 1630 11 15일 바이에른에서 세상을 떠났다.

     

     여담을 한 가지 덧붙이면 요하네스 케플러는 마녀로 몰린 어머니를 변호해야 했다. 세부 사실은 분명치 않지만 케플러의 어머니인 카타리나가 마녀로 공개리에 고소당한 것은 틀림없다. 그녀는 비방 혐의로 제소되었다. 종교 개혁과 그 이후 시기에는 곳곳에서 마녀가 넘쳐 났고 그들의 권능을 믿는 이가 많았다. 그녀를 고소할 만한 근거 있는 사유가 제기되었다. 1617년 케플러는 어머니를 위해서 탄원서를 쓰고 누명을 벗겨 달라고 간청했지만, 1620년 어머니는 체포당하고 만다. 일흔다섯의 그녀가 어두 컴컴한 아마포 함에 갇혀서 집 밖으로 끌려 나갔다. 고문대에서 고문당하며 위협을 받았고 후에 방면되었으나 1622년에 눈을 감고 만다.

     

     어머니가 겪은 혹독한 시련 때문이었는지 케플러는 한 편의 수고를 썼는데, 그것이 1610년 무렵 배포되었다. 거기서 그는 어머니를 달에서 온 악마와 접촉 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 일이 그가 죽고 나서 출간된 『꿈』의 유래가 아닌가 여겨지고 있다. 『꿈』은 뛰어난 비유이자 얼마간은 위장한 자서전이다. 케플러는 달 여행을 상상했는데, 달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무서운 세계로, 뜨거워 바 싹 말라 버린 데도 있는 얼어붙은 곳으로 나타난다. 또 달에는 뱀같이 생긴 거대한 종족이 사는데 날개 달린 것도 있고 기어 다니는 것도 있다. 『꿈』은 케플러의 과학적 상상력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여실히 보여 줄 뿐 아니라 그가 일으킨 지적 논쟁의 증거도 된다. 케플러는 과학의 역사에서 중추를 이루는 인물일 뿐만 아니라 모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헌신적이었고 "나는 진지하게 종교를 받아들인다. 종교로 장난하지는 않는다"고 쓰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가 연구한 결과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막론하고 교회의 고유한 권위를 영원히 뒤집어엎는데 이바지했다.

     

     케플러는 모든 분야에서 자신의 신념을 공공연히 옹호하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해내지 못하는 그런 몇 안 되는 인물에 속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출생 배경을 이루는 지적 전통에서" 자신을 해방한 그를 존경한다며 이렇게 썼다. "교회의 권위에서 나온 종교 전통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과학의 사고와 경험에서 퍽 중요한 관념들과, 더 나아가 우주와 인간 영역 안에서 그 본성과 행동의 한계들에 관한 보편 개념들까지 포함한 전통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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