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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와 태양 중심의 우주THE SCIENTISTS 2024. 3. 22. 11:06
정지해 있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을 이룬다는 관념은 총명한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가 고안한 수학적 체계에 의해 뒷받침된다. 우리가 오늘날 밤하늘을 묘사하는 데 쓰는 북두칠성 등 다양한 별자리의 기술도 중세에 『알마게스트』로 알려진 프톨레마이오스의 책에 힘입은 바 크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는 수백 년 동안 강력했고 굳게 믿어졌으며, 더욱 중요하게는 현실 세계를 바라보는 모든 방법 가운데 핵심이 되어 왔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는 낙하물과 별들과 구름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핵심이자 우주에서 인간 존재가 어디에 있는가를 설명하는 신학적 해석의 중심을 차지했다.
그러나 16세기 무렵 항해를 통한 발견으로 다양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증거들이 나타나고 로마 교회의 권위가 뒷걸음질 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도 기울기 시작한다. 마침내 1543년 사후 출간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 의해 프톨레마이오스 체계가 몰락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렇게 썼다. "지구는 달이 지나는 길을 데리고, 다른 행성 들과 함께 1년 주기로 태양 주위를 도는 거대한 궤도를 지난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2월 19일 폴란드 땅인 토룬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클라스 코페르닌은 상인이었고 어머니 바르바라 바첸로데는 교양 있고 잘 사는 집안 태생이었다. 열 살 때 아버지를 여읜 뒤로 그는 외삼촌 손에서 자랐다. 외삼촌은 학자이자 성직자로 1479년에 에르미란트의 주교가 된 사람이었다. 니콜라우스는 전형적인 교육을 받았다. 1491년 당시 자연 철학의 중심지로 이름난 크라코프 대학에 다니기 시작했다. 1496년에는 볼로냐 대학으로 옮겨 그리스어, 수학, 철학, 천문학 등을 계속 공부했다. 이 시절 그는 도메니코 마리아 다 노바라의 영향을 받는다. 다 노바라는 프톨레마 이오스 체계를 비판한 초기 인물로 천문학교수였다.두 사람은 1497년 3월 9 일 함께 월식을 관찰했다. 1501년에 코페르니쿠스는 파도바 대학에서 공부했고, 1503년 페라라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파도바로 돌아와 의학부 과정을 밟았다.
1506년 무렵 코페르니쿠스는 공부를 마치고 언어학자이자 수학자, 의사로서 폴란드로 돌아와 죽기까지 그곳에 머문다. 해외에서 공부하는 학생 신분이었지만 1497년 성당 참사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몇 년 뒤 외삼촌의 의학 고문 일을 맡았고, 외삼촌이 죽자 동프로이센에 새로이 세워진 프라우엔부르크 대성당의 참사 회원 일을 맡았다. 성당 참사 회원이란 아무런 종교적 의무도 없는 직책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일생 동안 어떠한 종교적 동기를 가져 본 적이 없는 듯하다. 그는 일반 행정관, 판사, 세금 수금원, 의사로 활동했다. 남는 시간 에는 천문학자였고, 1513년에 별을 관측하는 탑을 세웠다.
코페르니쿠스 사상의 형성과 발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그는 공표를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다. 1514년에 벌써 우주에 관한 생각을 요약한 수고를 돌려 읽게 했다(그 수고는 19세기가 되어서야 출판된다). 그의 걸작은 1530년 에야 완성된다. 10년이 지난 뒤 그를 추종한 게오르그 요아킴 레티쿠스(George Joachim Rheticus)가 『최초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요약판을 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왔을 때 교회는 아무런 적대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 책에 담긴 뜻이 곧장 명백해지지는 않았던 까닭이다. 어쨌거나 이제 코페르니쿠스에게는 장애가 없어졌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그가 죽은 해인 1543년 누렘부르크에서 출간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부동의 지구를 가정하는 프롤레마이오스의 주장에 초지일관 강하게 반대한다. 조화를 선호하는 선입관을 지닌 그는 물질적 근거를 제시하여 지구가 틀림없이 우주의 중심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무너뜨렸다. 예컨대 그는 별들이 언제나 지구로부터 똑같은 거리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주전원(周轉圓: 큰 원의 원주 위에 중심을 두고 작은 원이 운동하는 궤도)으로 그 현상을 설명하려 애썼지만 결과는 불만족스러웠고 복잡하게 꼬였다. 물리 이론이 없었기에 코페르니쿠스는 결국 고대의 개념과 근대의 개념을 뒤섞은 태양계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는 가속과 낙하 물체의 문제를 의식했지만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는 근대의 힘 개념도 알지 못했고, 그래서 천구를 믿었고, 공간을 돌진하는 행성이란 개념도 없었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끝내 전 유럽의 학자들 수중에 들어갔다. 초기에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은 그 책의 수학에만도 매혹당해 버렸다. 수학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한계에 대한 불만이 커 가고 있음을 더욱 부각시켰다. 종교계도 반대하지 않았다. 종교 개혁 기인 당시 카톨릭 교회에는 이미 구워 먹기에도 너무나 큰 고기가 있었던 까닭이다. 161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갈릴레오의 성공으로 교회가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금지하게 된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아주 유용한 용어이다.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처음 그 용어를 쓴 이래로 200년 이상 그 용어의 실제 내용을 두고 수많은 토론과 논쟁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용어는 코페르니쿠스가 프톨레 마이오스 천문학과 절연하고 태양 중심 모델을 남보다 먼저 만들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코페르니쿠스가 그러한 일을 혼자서 이루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그런 뜻으로 받아들여져서 과학사가인 J. L. E. 드레이어 같은 이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오늘날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가리키는 내용은 코페르니쿠스가 만든 것이 아니다." 버나드 코언은 이렇게 결론 내렸다.
"천문학에 혁명이 있었다면 케플러의 혁명이고 뉴턴의 혁명이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이라는 말에는 타당한 의미가 없다." 이러한 언급이 코페르니쿠스의 영향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코페르니쿠스가 실제 이룩한 업적에 맞게 균형 있게 표현하고자 한 것뿐이다. 오언 진저리히는 또 이렇게 주장한다. "당대에 코페르니쿠스가 다른 동시대인들보다 앞서기는 했어도, 수학적인 면에서 프톨레마이오스나 케플러에 견줄 만하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과학 혁명을 촉진한 예민한 몽상가로서, 우주론의 천재로서 코페르니쿠스에 버금가는 이는 별로 없다."
인간 코페르니쿠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 편이다. 친구인 레티쿠스가 썼다고 하는 전기는 분실되고 없고, 그가 쓴 편지들도 대부분 없어졌다.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코페르니쿠스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천구의 회전에 관하 여』의 사본을 받아 보았다. 뇌일혈로 고통받던 그로서는 어떤 수정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1543년 5월 24일 눈을 감기 전에 책을 만져 볼 수는 있었다. 정직하고 성실하며 광대뼈가 툭 튀어나왔으며 꿰뚫어 보듯 주시했다는 등의 잘 알려진 인상이 얼마 안 되는 초상화를 통해 전해 온 것이다. 그는 비잔틴 제국의 시인 테오필락투스 시모카타가 그리스어로 쓴 85수의 짧은 시를 라틴 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이 시들 가운데에는 도덕적인 것도 목가적인 것도 있으며 상스러운 내용도 있다. 20세기 우주론자인 프레드 호일(Fred Hoyle)은 마지막의 상스러운 시들에 감사의 인사를 했는데, 이유는 만약 그마저도 없었다면 호일 자신은 "코페르니쿠스가 웃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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