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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티코 브라헤와 새로운 천문학
    THE SCIENTISTS 2024. 4. 12. 10:42

     

     덴마크의 귀족 티코 브라헤(Tycho Brahe)는 천문학사에서 엉뚱한 인물이다. 사람들과 융화하지 못하고 거만한 그는 1572년 초신성을 처음 발견한 일로 유명해져서 덴마크 내포(內浦)의 한 섬에 천문대와 성을 지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믿지 않았지만, 운 좋게도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따르는 요하네스 케플러를 후계자로 삼았다. 코페르니쿠스와 브라헤와 케플러, 그리고 갈릴레오 갈릴레이, 이 네 사람이 고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뒤집고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서 밀어냈다. 브라헤는 그들 가운데서도 보수적인 인물로 그의 재능은 끈기 있게, 또 근대적으로 별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정확한 데이터를 추구한 데 있다. 토머스 쿤(Thomas Kuhn)은 이렇게 썼다. "코페르니쿠스가 16세기 전반의 가장 위대한 유럽 천문 학자라고 한다면, 티코 브라헤는...... 그 다음가는 걸출한 천문학 대가였다. 그리고 순수하게 기술적인 숙련으로만 평가한다면 브라헤가 단연 으뜸이었다."

     

     티게(뒷날 라틴어식으로 티코로 바꿈) 브라헤는 1546년 12월 14일, 지금은 스웨덴에 속하지만 그때는 덴마크의 일부였던 스카니아에서 태어났다. 최상층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오토 브라헤와 베아테 빌레의 열 명의 자식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삼촌인 예르겐 브라헤와 숙모의 손에서 컸다. 삼촌 내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가정 교사에게서 얼마 동안 교육을 받은 뒤, 열세 살이 되었을 때 루터파의 코펜하겐 대학에 입학했다. 거기서는 교양 과목을 가르쳐서 브라헤는 3학(수사학, 논리, 문법)과 4학(천문학, 산수, 음악, 기하) 과정을 마치고 삼촌이 원하던 법학 공부를 할 채비를 했다.

     

     그러나 1560년 8월 21일로 예언된 개기일식을 본 뒤로 브라헤는 천문학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가족이 반길 리가 없었다. 가족은 그가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기자 법률 공부를 시킬 교사를 고용해 딸려 보냈다. 이 기간 동안 브라헤는 비밀리에 과학을 공부했는데, 아직 어린 그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그 이야기를 하자면, 그는 스승이 잠자는 동안 별을 공부하러 몰래 나갔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1563년 8월 토성과 목성의 근접을 관측한 뒤, 브라혜는 당시 천문 역표(天文歷表: 천체 위치 추산표)의 수치에 적지 않은 오차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오차를 바로잡고 싶었고 결국 케플러가 '불멸의 천문학자'로 칭송하게 되는 인물로 성장했다.

     

     1565년 삼촌이 죽자 코펜하겐으로 돌아와 이듬해부터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천문학을 공부한다. 1566년 결투를 하다가 코의 일부가 날아갔다. 결국 브라헤는 금속제 보철을 착용했는데, 이것이 그가 죽은 지 한참 후에 주목을 끌게 된다. 1901년 그의 유해를 파 보았을 때 코를 관통하는 뼈가 옅은 녹색으로 녹슬어 있는 것이 발견된 것이다. 부식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그의 보철이 금이나 은일 것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실은 구리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1572년 11월 11일 일몰 후의 쾌청한 밤에 "전에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별을 발견했다. 그 별은 내 머리 바로 위에서 다른 별들보다 훨씬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라고 브라혜가 쓴 적이 있다. 그는 그 항성을 겨울 내내 육분의(六分儀) 로 추적해서 태양과 달과 행성들의 위치를 꼼꼼하게 기록했다. 브라헤는 그 항성의 시차를 측정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는 그 항성이 달 가까이 있지 않음을 뜻했다. 게다가 그 별은 움직이지 않았고, 혜성도 아니었으며, 행성들의 궤도권과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별은 여덟 번째 영역인 항성에 속했다. 실제로 별처럼 빛났다. 그렇지만 완전하고 불변이라고 상정되어 온 하늘에 어떻게 새로운 무엇이 출현한단 말인가? 그가 『새로운 항성에 대하여』라는 짧은 책을 출간한 뒤 티코의 별'로 알려진 이 항성은 고대 그리스인인 히파르코스(Hipparchos) 시대 이래 관측된 천체에 처음으로 추가된 사항이었다. 유럽 전체에서 천문학자들과 식자들이 이 사실을 추적했다. 대체로 그들은 이듬해 봄 그 별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어떤 조정이 필요함을 인정했다.

     

     1576년 브라헤는 덴마크 왕인 프레데리크 2세로부터 장려금과 영지를 하사받아 덴마크 내포에서 좀 떨어진 흐벤 섬을 소유하게 된다. 여기에 우라니보르 그(하늘의 성)를 세웠고, 그 뒤 두 번째 천문대인 스테르네보르그(별들의 성)를 세워 20년 동안 거기서 살며 작업했다. 망원경은 없었지만 망원경의 등장은 30여 년 뒤의 일이다. 수많은 조수들의 도움을 받았고, 어마어마하게 큰 사분의와 원주 바퀴, 거대한 회전 혼천의(渾天儀) 등의 관측 기구들을 놀라우리만치 잘 배열하여 활용했다. 1577년 브라헤가 초침이 달린 시계를 받은 그 해에 긴 꼬리를 단 혜성 하나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수많은 논평이 쏟아졌고 재앙이 오고 있다는 둥 말도 되지 않는 예언도 나왔다. 혜성의 출현으로 고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수정이 필요함이 더더욱 명백해졌다. 브라헤는 그 혜성이 틀림없이 달보다 훨씬 멀리 있고, 그래서 지구의 대기를 지나갈 수 없었음을 보여 주었다. 또한 중요한 것은 혜성이 궤도를 그리지 않았으므로 결정체로 된 천구를 뚫고 지나갔으리라는 것이었다. 결국 브라헤는 보이지 않는 천구가 존재할 수 없음을 논증하는 책을 냈다.

     

     1577년의 혜성은 태양 중심의 태양계를 상정하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입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었다. 브라헤도 나중에 이 점에 주목한다. 하지만 브라헤는 지구 중심 모델을 계속 고수했다. 결국 그는 지구와 달이 중앙에 있고 다른 행성들이 그 주위를 도는 티코 체계를 만든다. 완전히 틀린 것이지만 수학적으로는 이미 알려진 여러 사실만이 아니라 코페르니쿠스의 이론과도 맞아떨 어졌다.

     

     1588년 프레데리크 왕이 죽자 브라헤는 후원자를 잃었다. 그는 다음 왕인 크리스티안 1세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서 집과 일을 잃었다. 1597년 돈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거주지도 정하지 못한 채 무거운 기구들을 지고 흐벤섬을 떠난다. 2년 뒤에 프라하에 도착했는데, 지식인들을 보호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의 후원을 받게 되어 성과 보조금을 받는다.

     

     1600년 브라헤가 요하네스 케플러를 조수로 채용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는 얼마 더 살지 못했던 것이다. 1601년 저녁을 먹다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열흘 뒤인 10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임종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조심스레 간직해 온 항성 관련 자료를 케플러에게 넘겨주었다. 자신이 해온 작업을 완수하여 책으로 펴내 달라는 당부와 함께. 케플러는 1603년 브라헤의 『새로운 천문학 입문』을 편집하여 출간했다. 그 책에는 777개에 달하는 별의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자료는 1627년 왕의 이름을 딴 『루돌프 목록』에 활용되었다.

     

     프라하에 매장된 브라헤의 유해는 지금 구(舊)시가 광장에 있는 교회 밖 지하 묘실에 있다. 그리고 뒤에 스웨덴에 귀속되어 지금은 벤으로 불리는 흐벤섬에는 또 다른 기념물이 생겨났다. 1930년에 박물관이 세워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의 성, 우라니보르그가 있던 자리는 도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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